A를 처음 만난 건 대학교 때였다. 그녀는 스스로 어리바리하고 소심한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내 눈에 비친 그녀는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했던 사람이었다. 내가 옳은 말을 하더라도 그녀가 모르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조건 틀렸다고 단정 지었다.
그날도 그랬다.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학교 앞 카페에 들렀다. 카페에서 부드러운 멜로디가 흘러나왔고 어디선가 들어본 익숙한 멜로디에 나는 친구들에게 물었다.
“이거 피처링(featuring) 한 가수 누군지 알아? 노래 진짜 잘한다.”
그 말을 듣자마자 A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더니 입꼬리를 한쪽만 살짝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야, 피처링 아니고 페터링이야. 하하.. 피처링이래. 피!처!링! 와, 진짜 너무 웃기지 않아?”
언니가 말을 잘라도, 내 이야기를 비틀어도 ‘아, 나보다 언니니까’라는 이유 하나로 스스로 납득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맞고 A가 틀렸다는 걸 알았지만 A의 실수를 지적하고 싶지 않았다. 괜히 말 꺼냈다가 얼굴을 붉히는 상황이 생길 것 같아 그저 한숨처럼 속으로 중얼거렸다. 관계 속에서 내 자리는 언제나 아래였고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과의 사이였다.
‘그래, 너는 짖어라.’
그런 일들이 하나둘 쌓였다. 사소한 말꼬투리, 은근한 무시가 반복될수록 마음이 닳아갔다. 불편함을 외면하는 게 어른스러운 거라 생각했고 참는 게 이기는 거라 믿었다. 2년이 흘러 우리는 졸업을 했고 이후 각자의 삶에 바빠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졌다.
스물다섯 살이 되었을 무렵, 나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어학연수를 위해 아일랜드로 떠났다. 영어를 배우며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는 동안, 나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가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방학 기간에는 오랫동안 꿈꿔왔던 ‘산티아고 도보순례’에 도전했다. 그 특별한 여정을 마치고 돌아왔을 즈음, A에게서 뜻밖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아란, 나도 회사 그만두고 어학연수 가려고.”
“어디로 가려고요?”
“아일랜드나 호주.”
그녀의 말은 의외였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도시의 활기를 좋아하던 A였기에 초록빛 초원이 펼쳐진 아일랜드라는 선택은 낯설게 느껴졌다. 그런 조용한 풍경이 그녀와 어울린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거기는 어때?”
그녀가 물었다.
“제가 있는 도시는 작고 아담해요. 시골 분위기가 좋아서 왔지만 언니한테는 심심할 수도 있어요. 여기보다 큰 더블린이나 다른 도시도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진심과 경험을 담아 진심으로 조언을 했지만 A는 결국 내가 다니던 어학원에 등록했고 우리는 아일랜드에서도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낯선 나라에서 다시 얽힌 인연은 어쩐지 묘하게 느껴졌다. 몇 개월을 함께 학원에 다니다 내가 먼저 한국으로 돌아갈 시점이 다가왔다. 아쉬움과 기대가 뒤섞인 마음으로, 그동안 함께했던 친구들에게 말했다.
“아일랜드에서의 어학연수도 정말 값진 시간이었지만, 산티아고 도보순례는 제 인생의 최고의 경험이었어요. 매일 걷는 길에서 마주친 다양한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나눈 순간들은 마음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어요.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걸어보시길 적극 추천드려요.”
그렇게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A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나 산티아고 가려고 하는데 배낭 좀 빌려줄 수 있어?”
“네. 그럼요! 집으로 보내드리면 될까요?”
A는 가족이 요즘 일하느라 바쁘다며 현실적으로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어렵다고 했다. 직접적으로 보내달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상황을 돌려 말하면서 은근히 내가 알아서 보내주길 바라는 듯했다. 부탁하는 건 그녀였지만 책임은 조심스럽게 내게 넘어와 있었다. 국제우편비용은 생각보다 부담스러웠지만 좋은 경험을 위한 도움이라 생각하며 배낭을 정성껏 포장해 보냈다.
“언니, 이건 저에게 소중한 거니까 한국 올 때 꼭 가져다주세요.”
“당연하지.”
A가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소중한 물건이니까 꼭 돌려달라고 나는 몇 번이고 강조했다. A는 알겠다며, 고맙다고 답했다. 몇 달 뒤, A가 귀국했고 우리는 함께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 안부를 주고받으며 평범한 대화가 이어지던 중 A가 갑작스럽게 말했다.
“미안해. 배낭이 너무 더러워져서, 그냥 버리고 왔어.”
배낭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30일간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함께 걸으며, 매일같이 내 등에 얹혀 고되고 낯선 길을 함께 견뎌준 동반자였다. 그저 ‘짐을 넣는 도구’가 아니라 내 걸음과 체온과 숨결을 함께 버텨냈던 내 추억의 일부였다. 언젠가 또 다른 여행을 떠나게 될 때 그 배낭은 다시 한 번 내 등에서 나와 함께 걷게 되길 바랐다.
하지만 A는 단 한마디 설명도 없이 버렸다. 자초지종 상황 설명과 사전에 배낭 사진을 보내줬더라면 이렇게까지 실망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저 ‘미안해’ 한마디로 A는 내 마음과 추억이 담긴 배낭을 버렸고 나에 대한 존중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내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배신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단지 배낭을 버린 게 아니었다.
내 마음과 추억을 아무렇지 않게 짓밟고 지나간 사람이었다. 물건을 돌려받겠다는 당연한 권리이자 최소한의 예의를 바랐을 뿐인데 왜 A는 그런 기본적인 것도 무시했을까.
그 순간부터 마음에 멍이 들었지만 A에게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다. 나이 많은 그녀에게 화를 내는 건 예의 없는 일처럼 느껴졌고 참으면 된다고 믿었다. 그때 나는 관계를 끊는다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낯설게 느껴졌고 그저 참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처럼 여겨졌다.
돌이켜보면 그건 참은 게 아니라 내 마음을 외면한 채 방치한 시간이었다. 빌려준 물건을 돌려받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는데 무엇이 A를 그토록 당당하게 만들었는지 그 태도는 지금까지도 이해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