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게도 나는 A를 완전히 끊어내지 못했다. 여러 번 마음을 정리하려 했지만, 오래된 습관처럼 다시 연락을 이어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A가 내가 사는 동네로 이사를 왔다. 멀어져 있던 거리감이 물리적으로도 사라지자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자주 만나게 되었다.
처음엔 반가웠다. 오랜 친구가 가까이 있다는 건 어쩐지 든든한 느낌이었고 다시 편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있었다.하지만 곧 익숙한 피로감이 다시 찾아왔다. 대학 시절에 내가 묵묵히 넘겼던 몇 번의 ‘참을 인’을 되새겨야 했던 그 순간들이 다시 되풀이됐다.
약속을 잡을 때마다 나는 시간을 지켜야 한다는 긴장감을 느꼈고 A는 늘 그것을 무너뜨렸다. 6시에 만나기로 하면 A는 그 시간에 막 집을 나서는 사람이었다. 기다림은 당연한 것이 되었고 나의 시간은 점점 사라져갔다. 심지어 때로는 “미안해”란 말도 없이 웃으며 등장했다. 그 뻔뻔하고 무례했지만 나는 그마저도 넘기는 사람이었다. 그날은 운동을 함께하기로 한 날이었다. 7시에 만나기로 했고 나는 평소처럼 늦지 않게 나갈 준비를 했다. 그때 A에게서 문자가 왔다.
“아란, 동생이 강아지를 맡기고 갔어. 엄마 아빠가 곧 오실 건데 그때까지 강아지 혼자 두고 나가기 좀 그래서... 저녁먹고 만나자.”
“얼마나요?”
“7시 30분에 보자.”
엄마가 구워주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고등어구이와 밥을 든든하게 챙겨 먹고 약속 시간이 되어 준비를 했다.
“아란, 부모님이 안 오시네. 조금만 더 기다려줘.”
10분, 20분. 시간은 계속해서 지났지만 A의 부모님은 오시지 않았고 나는 언제 올지 모르는 A의 부모님을 함께 5분 대기조처럼 기다려야 했다. 30분쯤 지났을까. 내가 왜 정확한 도착 시간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마음 한쪽이 허물어지는 기분이었다. 왜 내가 이런 상황까지 참고 있는 걸까. 반복되는 무례함은 그날따라 유난히 크게 다가왔다.
“얼마나 기다려야 해요? 그럼 오늘 말고 다른 날 만나요.”
평소 같으면 그냥 넘겼겠지만 그날은 달랐다. 내 안의 인내심은 바닥난 상태였다.
A는 몇 분 후 답장을 보내왔다.
“아니야. 강아지 혼자 두고 나갈게. 10분 후에 나와.”
그 말에 나는 잠깐 멍해졌다. 처음부터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왜 내 시간을 아무렇지 않게 소비한 걸까. 그 답장에서 A에게 내가 비로소 어떤 존재였는지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10분 후, 약속대로 A를 만났다. 그녀의 차에 올라 근처 공원으로 향하는 내내 차 안의 분위기는 무겁고 어색했다. 말은 없었고 서로 눈길을 피하는 사이 바람 소리만이 창 너머로 흘렀다. 긴 침묵 끝에 A가 무심하게 말을 꺼냈다.
“집 나서는데 강아지가 낑낑거리더라.”
“그러게요. 다음에 만날 걸 그랬어요.”
짧은 대화 속에서도 불편함이 묻어났다. 나는 그 어색함을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길 바라며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A가 코를 내 옷에 대고 킁킁거리더니 키득거리며 말했다.
“아란아, 너한테서 마트 생선코너 냄새 나.”
A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혼자 크게 웃었다. 내 옷과 머리카락에 배인 생선구이 냄새는 그저 저녁을 먹고 나온 탓만은 아니었다. 그건 A의 반복된 지각과 그 시간을 아무 말 없이 기다린 나의 하루가 남긴 냄새였다.
‘무리해서 무례하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 웃음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에는 타인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무신경함과 늘 나를 가볍게 여겨온 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방금 전까지 느꼈던 저녁의 따뜻함, 엄마가 정성스레 구워주신 고등어 냄새와 식탁 위의 온기도 조롱당한 것 같아 마음 깊은 곳에서 서러움이 차올랐다. 내가 왜 그 냄새를 품고 나왔는지를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봤더라면 A는 내 앞에서 그렇게 웃지 않았어야 했다.
A의 웃음 속엔 타인을 향한 배려도, 미안함도 없었다. 타인의 일상과 감정을 가볍게 넘기는 익숙한 이기적인 가벼움만이 가득했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완전히 꺾였다.
‘나는 네가 그렇게 대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야.’
그날 이후, 나는 A를 만나지 않았다. 자잘한 상처들이 켜켜이 쌓여 더 이상 A를 견딜 수 없었다. 며칠 뒤 A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지만 답하지 않았고 A의 번호를 차단했다. 번호를 지우는 순간까지도 '10년의 우정 같았던 관계를 이렇게 끝내도 괜찮을까?' 하는 묘한 죄책감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냄새가 있다. 그건 고등어 냄새가 아니라 너무 오래 참아버린 상해버린 관계의 냄새였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괜찮아질 거라고 10년 동안 믿었던 기다림 속에서 서서히 삭아가던 내 마음의 냄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