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려진 셔츠, 쓰린 살결

by 북극곰

면접장의 공기는 차고 예리했다. 정면을 응시하며 미리 다듬어온 문장들을 하나씩 꺼내 놓았다. 떨림을 억누른 목소리가 생각보다 정갈하게 울려 퍼졌고, 나는 비로소 안도했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마음의 날을 수없이 갈아왔으니까. 이번만큼은 나라는 사람의 쓸모를 제대로 증명하고 싶었다.


질문이 이어졌고, 나는 익숙한 궤도를 도는 인공위성처럼 준비된 답변들을 송출했다. 나를 설명하기 위해 수천 번 덧칠했던, 무뎌진 문장들. 그때였다. 시선이 곁눈질로 슬쩍 옆자리를 훑은 것은.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이 이질적인 공간에 존재할 리 없다고 부정하고 싶었다. 고등학교 2학년, 낡은 책상을 맞대고 앉아 함께 졸음을 견디던 짝궁.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기울기의 햇살을 받으며 같은 크기의 꿈을 꾸던 복사본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 시절의 조각이 갑자기 이곳으로 툭 떨어졌다. 나는 합격이라는 문턱을 넘으려는 '지망생'이었고, 그 애는 이미 그 문 안쪽의 풍경이 된 것처럼 견고하게 앉아 있었다.


순간, 머릿속에서 오래전 기억이 소용돌이쳤다. 야간 자율학습도 거부하고 대학 따위는 안 가겠다며 소리치던 나의 서툰 반항들. 그때 내가 세상에 던졌던 무모한 고집들이 긴 시간을 돌아 이제야 '부메랑'이 되어 내 심장을 겨누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버렸던 시간들이 그 애에게는 계단이 되었고, 나에게는 넘지 못한 담벼락이 되어 돌아온 것일까.


그 애의 입술이 열렸다. 그리고 나를 향해 날카로운 질문 하나를 던졌다.

준비한 답변의 범위를 교묘하게 벗어난, 나의 허점을 정확히 파고드는 질문이었다. 그 애가 의도했든 아니든, 그 문장은 공중에서 차갑게 얼어붙었다. 입술은 여전히 기계적으로 움직였지만, 내 마음은 이미 길을 잃고 엉뚱한 정류장에 서 있었다.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얗게 변했고,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내가 선택한 것은 비겁한 도망이었다.


"그 부분은...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답변드리고 싶습니다."


다음이라는 기약 없는 단어 뒤로 숨어버린, 초라한 얼버무림. 고개를 숙인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정갈하게 다려진 면접 복장이 아니라, 십수 년 전 교복을 입고 교문을 뛰쳐나가던 철없던 나의 뒷모습이었다. 철없던 시절의 방황이 오늘 이 자리에서 '대답할 수 없는 비겁함'으로 치환되는 순간이었다.


이상했다.


그 친구 여기 있는 건 그저 각자의 삶이 흐른 결과일 뿐인데.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나는 갑자기 썰물이 빠져나간 갯벌 위에 홀로 남겨진 조개껍데기처럼 작아졌다.


나는 나름의 보폭으로 성실히 걸어왔다고 믿었다. 남의 발을 밟지 않으려 애썼고, 내 몫의 짐을 지고 묵묵히 언덕을 오르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언젠가는 모두가 만나는 광장에 도착할 줄 알았다. 크게 앞서가진 못해도, 적어도 같은 계절을 살고 있다고 믿었던 믿음이 발밑에서부터 가늘게 금을 그었다.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었던 거리가, 이제는 건널 수 없는 강처럼 깊고 아득했다.


면접은 계속 이어졌지만 면접 질문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애는 나를 알아봤을까. 알아봤다면 연민했을까, 몰라봤다면 안도해야 할까. 나는 어느새 면접의 결과보다 '그 애의 눈에 비친 나'에 더 매달리고 있었다.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해 부유하는 먼지 같은 사람으로 보였을까 봐, 그게 속상했다.


그 애가 그 자리에 앉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는지 나는 모른다. 타인의 성취 뒤에 숨은 가시밭길을 무시한 채, 오직 내 초라함에만 집중하는 건 비겁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의 진동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면접이 끝나고 문을 나섰다. 복도를 걷는 내 발소리가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표정을 고쳤지만 마음의 한 귀퉁이는 이미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정교한 시계 태엽 사이에 모래알 하나가 끼어버린 것 같은, 서걱거리는 불쾌함.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는 언제부터 다른 속도로 걷기 시작했을까. 아니, 어쩌면 우리는 처음부터 서로 다른 타임라인 위를 걷고 있었는데, 고등학교라는 거대한 정거장에서 잠시 나란히 멈춰 서 있었던 건 아닐까.


다려진 셔츠 안쪽으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살결을 쓰리게 스쳐 지나갔다.


작가의 이전글아웃포커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