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포커싱

너라는 선명한 문장

by 북극곰

가끔 세상의 소리가 일제히 소거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누군가 내 주변의 볼륨 다이얼을 왼쪽으로 끝까지 돌려버린 듯, 카페 안의 덜컹거리는 컵 소리도, 거리를 지나는 자동차의 메마른 경적도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맥을 못 춘다. 마치 커다란 장막이 무대 위로 천천히 내려와 불필요한 소란을 정리하듯, 세상은 고요의 침잠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리고 그 정적의 중심에, 오직 너만이 홀로 빛을 받으며 서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세상 전체가 숨을 고르며 너를 위해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주변 사람들은 마치 소인국의 사람들처럼 작아지고, 내 망막에는 오직 너의 존재만이 비정상적으로 거대하게 들어찬다. 하얀 도화지 위에 홀로 선명하게 채색된 주인공처럼, 너는 배경과 분리되어 내 눈앞에 오롯이 떠오른다.


이것은 아마도 내 마음이 일으키는 '아웃포커싱'일 것이다. 렌즈의 초점이 너라는 좌표에 닿는 순간, 너를 제외한 모든 피사체는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뿌옇게 흐려진다. 날카롭던 건물들의 선과 무심한 행인들의 얼굴이 부드러운 빛망울로 번져나가는 것. 그것은 오직 너라는 주인공을 위해 세상이 잠시 눈을 감아주는 고요한 배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선명함은 허락된 축복이자, 동시에 나를 벌거벗기는 독이 된다. 너를 향해 고정된 초점은 내 안의 떨림까지 투명하게 투사해버리고 만다. 네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는 꼴을 들키지 않으려, 도드라진 마음의 채도를 낮추고 안간힘을 다해 마음의 조리개를 조인다. 너라는 유일한 주인공을 배경 속으로 거칠게 밀어 넣고 무심한 세상과 같은 선상에 두려 애쓰곤 한다.


사랑은 세상을 단순히 흐릿하게 만드는 마법이 아니다. 그 흐릿함 속에서 단 한 사람만을 지독하리만큼 또렷하게 목격하는 일, 그리고 그 선명함 때문에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견디는 일이다. 오늘도 나는 내 망막에 맺힌 너의 잔상을 지워내며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너에게 흐릿한 미소를 지어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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