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기한을 사는 사람들

by 북극곰

매일 아침 8시, 나는 거대한 철제 시루 속으로 발을 들인다. 개찰구를 통과하며 울리는 ‘삑’ 소리는, 오늘 하루도 신선도를 보장할 수 없는 삶에 입고되었다는 서글픈 출하 신호처럼 들리기도 한다.


지하철 문이 열리면 안은 이미 빽빽한 무채색의 숨결들로 가득하다. 타인의 어깨와 등에 밀려 안쪽으로 떠밀려 들어갈 때마다, 나는 내가 존엄을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는다. 그저 비좁은 시루 속에서 서로의 열기를 나눠 쓰며 버티는 콩나물 한 줄기가 될 뿐이다.


누군가는 이 치열함을 두고 “삶의 활력”이라 말한다. 하지만 그 안에 선 나는 활력이 아니라 서서히 시들어가는 것만 같다. 진짜 콩나물이라면 시원한 국이 되거나 고소한 참기름을 입고 식탁의 주인공이라도 될 텐데.

지금의 나는 어떤 역할도 맡지 못한 채, 눅눅한 공기 속에 놓여 있다.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은 마감 직전의 할인 품목처럼 생기를 잃고 흐릿하기만 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내 옆에는 아직 물기를 머금은 20대가 서 있다.

팽팽한 줄기를 세운 채 위를 향해 자라나는 얼굴들. 그들의 몸속에서 자라고 있는 것은 단순한 생기가 아니라, 아직 꺾이지 않은 ‘시간’일지도 모른다.


방향을 잃지 않은 채 위로 뻗어갈 수 있는 시간.

어디로 향할지 몰라도, 적어도 멈추지 않을 수 있는 시간.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아직 남아있는 시간.


반면 나는 이미 한 번 데쳐진 것처럼, 선택의 폭이 서서히 줄어드는 것만 같다.

문득 어릴 적 읽었던 ‘잭과 콩나무’ 이야기가 떠오른다. 잭이 창밖으로 무심코 던져버린 보잘것없는 콩알들은 하룻밤 사이 구름을 뚫고 하늘 끝까지 닿는 거대한 줄기가 되었고 나도 언젠가 어디론가 닿을 수 있을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 기적 같은 성장을 보며 설레던 소녀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내 손에 든 것은 하늘로 뻗어갈 마법의 씨앗이 아니라 오늘 하루를 겨우 통과하기 위한 낡은 교통카드뿐이다.


불혹(不惑)이라지만 현실은 매일 고용 불안이라는 파도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린다. 30대까지는 내가 세상을 선택하며 산다고 믿었는데 지금은 세상이 나를 선택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이 통렬하게 선명해졌다. 뿌리 내릴 땅은 허락되지 않았고, 잠시 놓였다가 옮겨지는 임시의 존재로 남았다. 시루 속에서 자리를 바꿔가며 버티는 콩나물처럼.


어쩌면 는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해 이 열기를 견디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시루 밖으로 쏟아지는 순간, 우리는 다시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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