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의 소각

by 북극곰

처음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어딘가 어설퍼진다.


덜 다듬어진 목각 인형처럼 몸짓 하나하나가 뚝딱거리다가 누군가가 내 마음을 기꺼이 받아주는 순간, 나는 비로소 숨을 얻는다.


마치 오래 잠들어 있던 피노키오가 간절한 손길에 힘입어 생명을 얻듯이. 그의 온기와 촉각이 나를 채우면 희미했던 나는 점점 더 또렷해진다.

그리고 굳게 믿는다. 이 감정은 세상 무엇보다 특별하며, 우리는 서로에게 유일한 구원이라고.


우리는 마음속에 보이지 않는 각도기를 꺼내 서로를 향한 기울기를 재기 시작한다. 서로를 향해 정확히 0도의 오차도 없이 기울어져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의 세계가 된다. 휴대폰 화면 속에 서로의 얼굴을 가두고, 일상의 아주 작은 파편들까지 수집하며 이 관계의 영원함을 증명하려 애쓴다. 그때의 우리는 서로가 세상의 중심이자 정답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익숙함은 때로는 시야를 흐리게 만든다. 소중함을 당연함의 뒷방으로 밀어내고 나면, 보이지 않던 균열이 시작된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향하고 있다고 믿지만 마음의 각도는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틀어지게 된다.


말투의 온도가 낮아지고, 시선이 머무는 끝자락이 달라진다. 함께 있어도 각자의 먼 곳을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갈 때, 권태는 그 비좁은 틈을 타 안개처럼 스며든다. "잔다." 라는 짧은 마침표 뒤에 각자의 밤이 생겨나고, 공유되지 않는 비밀스러운 시간들이 겹겹이 쌓인다. 결국 가장 들키고 싶지 않았던 비겁한 방식으로 우리는 서로의 어긋난 각을 잔인하게 마주한다.


그 순간 깨닫는다. 한때 우주의 전부였던 우리가 이제는 완전히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너는 15도, 나는 90도. 벌어진 틈만큼 우리는 이미 서로의 사정권 밖으로 벗어난다. 헤아릴 수 없는 각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채 우리는 결국 이별이라는 외길을 선택한다.


손끝으로 남아 있던 사진들을 하나씩 밀어내며 서로를 조용히 소각한다. 그 불꽃 속에는 우리가 함께 통과했던 계절과, 우리만은 특별할 거라 믿었던 그 찬란한 착각이 재가 되어 흩어진다. 한때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던 그 손길로, 이제는 서로를 지워내며 다시 예전의 딱딱한 나무 인형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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