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도보순례가 끝나고 아일랜드 골웨이에 돌아온 지 벌써 한 달이 흘렀다. 아일랜드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끝없이 펼쳐진 초록빛 들판 위를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양들, 거친 파도가 부서지는 솔트힐 바닷가에서 낚싯대를 드리운 채 고등어를 기다리는 사람들. 비가 오는데도 선글라스를 쓰고 조깅을 즐기는 이들까지. 금요일과 토요일 밤이면 북적이는 펍에서 울려 퍼지는 '골웨이걸'의 경쾌한 멜로디 역시 변한 게 없었다. 나도 여행자가 아닌 유학생의 신분으로 나는 다시 학원에 등록했다.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일상에 발을 디뎌보려 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산티아고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기분이었다.
학원에서 돌아온 나는 노트북을 켜고 메일함을 확인했다. 수신함에서 익숙한 이름이을 발견 하자마자 피로가 날아가는 기분이었었다. '발렌시아에 놀러 와' 제목을 클릭하자마자 두 사람의 유쾌함과 다정함이 가득 담긴 편지가 화면을 채웠다.
To. 아란
골웨이에는 잘 도착했어? 어떻게 지내? 나는 건축가로 바쁘게 일하고 있고, 키캐는 엄마를 도와 빵집에서 일하고 있어.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산티아고 길과 네가 그리워.
발렌시아에 오기로 한 거 잊지 않았지? 네가 10월에 발렌시아에 왔으면 좋겠어. 언제가 괜찮은지 알려줘.
보고 싶어 아란. Kiss
From. 크리스티앙 y 키캐
그들의 편지를 읽는 순간, 나는 곧바로 라이언에어 홈페이지를 열어 10월 말 발렌시아행 비행기표를 검색했다. 그리고 짧은 답장을 보냈다. 우리는 몇 번의 이메일을 주고받은 끝에 나는 발렌시아 여행 일정을 확정하고 10월 말 발렌시아행 비행기티켓을 예매했다.
설렘으로 가득했던 발렌시아 여행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두 사람을 다시 만나는 건 정말 행복하고 내 인생에 다시없을 축복이었다. 보고 싶고 그리웠던 이들과의 재회는 내 가슴을 벅차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변한서로의 모습에 실망하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건 '변하는 건 없다'라는 사실뿐이니까. '혹시 내가 두 사람의 삶에 불청객이 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일상이 익숙해지면 서로를 잊고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고 추억으로 남기는 것이 좋을까?
변화는 필연적인 것이라고 하지만, 한쪽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아니면, 한쪽만이 변했고 다른 한쪽은 그대로라면 그 괴리감은 누가 감당해야 할까? 이런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해서 마음속에 가득한 그리움을 애써 누르고 있었다. 그리움이란 감정만으로 그들과의 만남을 무작정 좇아가도 괜찮은 걸까, 아니면 이대로 좋았던 기억을 추억으로 간직하는 것이 더 나을까?
발렌시아로 출발하는 날, 나는 머릿속으로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하면서 스스로를 다독이며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는 발렌시아의 부드러운 가을빛 아래 착륙했다. 서늘한 아일랜드 날씨와는 달리 10월 말이지만 따뜻한 발렌시아의 햇살이 나를 감쌌다. 출국장으로 나가니 반가운 얼굴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