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가 30분 정도 연착됐지만, 키캐는 출국장에서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출구로 나가자마자 우리는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초록색 스웨터를 입은 그가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벌려 다가오는 모습은, 두 달이라는 시간 동안 조금씩 쌓여있을지도 모를 거리감을 단숨에 허물어버렸다. 키캐는 환한 웃음과 포옹으로 나를 환영해 주었다.
"웰컴 투 발렌시아."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보고 싶었어. "
그의 한마디에 두 달 동안 품고 있던 불안감과 걱정은 눈 녹듯이 모두 녹아내렸다. 혹여 어색해질까 두려워했던 마음도 기우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키캐의 미소로 모든 걱정은 설렘과 기쁨으로 바뀌었다. 차에 올라 그의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빵집으로 향했다. 키캐는 차 안에서 빵집과 부모님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키캐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빵집은 구시가지의 작은 골목 끝에 자리 잡은 3층 건물이었다. 1층은 빵집, 2층과 3층은 그의 부모님과 조부모님 댁이라고 했다. 차 안에서 우리는 두 달 동안의 일상을 주고받았다.
"크리스티앙은?" 내가 물었다.
"일하고 있어. 이따 저녁에 간디아에서 만날 수 있을 거야."
15분쯤 달려 도착한 골목은 스페인 정취가 물씬 풍겼다. 낮은 주황빛 건물들 사이에 자리 잡은 작은 빵집은 보기만 해도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문을 열자마자 고소한 빵 냄새로 가득했다.
키캐는 부모님이 오시기 전에 나를 이끌며 빵집 구석구석을 구경시켜 주었다. 오븐에서 갓 나온 쿠키들은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호박과 마녀 모양의 핼러윈 쿠키들이 포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쁜 하루의 흔적이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여기는 늘 이렇게 바빠?"
"맨날은 아니야. 요즘은 특별히 바빠. 곧 핼러윈이잖아. 우리도 그때가 대목이거든."
"핼러윈이라니... 시간이 정말 빠르다. 혹시 내가 도울 일 없을까?"
키캐는 내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란, 여행 온 거 아니었어? 여행 온 사람한테 일 시켜도 돼?"
"클라로! 키캐, 나는 발렌시아 오빠를 돕는 일이라면 뭐든 하고 싶어. 게다가 이런 경험은 아무나 못하는 특별한 경험이잖아. 스페인 빵집에서 일하는 것. 오히려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될 것 같은데?"
그때 문에 달린 종소리가 울리며 키캐의 부모님이 2층에서 내려오셨다. 빵집 한가운데 서있는 낯선 동양인이 자신의 일터에 서있자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마마, 파파"
키캐는 부모님께 다가가 나를 소개했다. 크리스티앙을 만나기 전까지 부족한 일손을 돕고 싶어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의 말을 들은 그의 부모님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갈고닦은 스페인어를 총동원하여 느리지만 또박또박 말했다.
"올라! 요 소이 꼬레아나 이 발렌시아나. 메야모 아란. 엔깐따다.(저는 반은 한국인, 반은 발렌시아인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발렌시아나?"
키캐 부모님과 키캐는 내 말을 듣고 짧은 탄성과 함께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 속에는 놀라움과 따뜻함이 묻어났다. 그렇게 나는 부모님의 환영 속에 빵집 일손을 돕는 걸로 발렌시아 여행을 시작했다.
키캐는 빵을 만들기 위한 부재료를 사러 나갔고 나는 그의 부모님과 함께 빵집에 남았다. 두 분은 영어, 나는 스페인어에 서툴렀지만 우리는 말보다 마음에 귀를 기울이며 대화를 이어갔다.
"아란, 이 쿠키 좀 포장해 줄래?" 키캐 어머니가 포장지와 쿠키를 가리키며 부탁하셨다. 쿠
"씨, 마마. (네. 엄마.)" 나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한국인은 빨리빨리 문화와 나의 조급한 성격은 여기서 빛을 발했다. 쿠키를 비닐에 넣고 리본으로 묶는 과정을 순식간에 끝내고 말했다.
"마마. 피니또!(끝났어요.) 오트라. 오트라. (다른 거 주세요.)"
키캐 어머니는 내가 포장한 쿠키를 매의 눈으로 하나하나 살펴보셨지만 불량품은 단 한 개도 없었다. 그녀는 나를 보며 놀란 듯 웃음을 터뜨리셨다. 쿠키 포장은 물론, 양파를 썰고 빵을 정리하는 등 여러 가지 작은 일도 속도를 더해 척척 해내자 마트에서 돌아온 키캐가 나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마, 손이 엄청 빠른 일꾼을 얻으셨네요."
키캐와 어머니와 스페인어로 몇 마디 나누더니 통역해 주었다.
"아란, 엄마가 숙식은 제공해 줄 테니까 여기서 3개월만 더 일하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