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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의 종소리

발렌시아 대성당

by 북극곰

"챠오."

"챠오."

짧은 아르바이트를 마내고 키캐 부모님의 배웅을 받으며 빵집을 나섰다. 10월 말의 날씨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발렌시아의 햇살은 참 따뜻했다. 거리에 있는 야자수가 이국적인 풍경을 더했다.


'빠에야의 본고장'이라 불리는 발렌시아는 스페인의 세 번째로 큰 도시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그리 익숙한 여행지는 아니었다. 바르셀로나나 마드리드는 물론이고, 그라나다나 세비야 같은 도시는 여행 일정에 포함되지만 발렌시아는 이상하리만치 늘 후보에서 밀려났다. 그렇지만 나는 두 달 전, 카미노에서 만난 잘생긴 게이 친구 덕분에 발렌시아에 오게 되었고 이제는 그가 발렌시아 관광가이드를 자처했다.


"아란, 발렌시아에서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이 있어?"

"아니, 나는 가고 싶은 곳보다는.. 빠에야랑 오렌지가 먹고 싶어."


나의 대답에 키캐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네가 그럴 줄 알았어. 그럼 우선 발렌시아 구시가지부터 가볼까?"


그는 나를 발렌시아 대성당으로 안내했다. 오래된 돌길을 따라 걸으며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서 깊은 건물들과 현대적인 가게들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거리에는 여유롭게 거닐거나 노천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아란, 저기 보이는 게 발렌시아 대성당이야." 키캐가 손짓하며 말했다.

"원래는 이슬람 사원이었는데 가톨릭이 재정복 한 이후 대성당으로 바뀌었어."


"우와~"


웅장한 대성당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산티아고 대성당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고딕, 로마네스크, 바로크 양식이 혼합된 건축물은 마치 시간이 층층이 쌓여 있는 것 같았다.


"여기에는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 때 사용했던 성배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보러 오기도 해.


"진짜? 성배가 여기 있어?"


"응. 저기 길게 늘어선 줄 보여?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입장 줄이야. 대성당은 스테인드글라스, 스페인 작가들의 그림, 볼거리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바로 성배지."


길게 늘어선 줄을 바라보니 발렌시아 대성당이 가진 명성과 역사적 의미를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성배는 나중에 보기로 하고 성당 첨탑에 올라가서 발렌시아를 내려다보자."


그는 성당의 상징적인 종탑인 '미겔레테타워'를 가리켰다. 14세기에 지어진 이 탑은 발렌시아 고딕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높이가 63미터에 달했다. 계단 입구에 서자 키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란, 계단이 꽤 많아. 우리 중간에 포기하기 없기!!"

"당연하지, 나 카미노 다녀온 사람이야."


호언장담했지만 전날 친구들이랑 '럭비'를 한 데다 새벽 비행기까지 타느라 제대로 쉬지 못한 상태였다. 피곤함이 밀려왔지만 나의 일일가이드인 키캐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선형 계단은 처음에는 넓었지만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졌다. 천장도 점점 낮아져서 어느 순간부터는 몸을 살짝 숙이고 올라가야 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이 점점 차올랐다. 다행히 앞서 가는 관광객들이 천천히 움직이는 덕분에 나도 한숨 고르며 속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그때, 계단 사이로 한줄기 햇살이 들어왔다. 앞서 가던 사람의 그림자가 나에게 살짝 드리웠을 때 정상이 코 앞에 있다는 직감 했다. 마지막 계단을 힘겹게 딛고 밖으로 나오자, 한순간에 시야가 탁 트였다.


"와.."


발렌시아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끝없이 이어지는 주황빛 지붕들 사이로 파란색 돔을 가진 모스크 양식의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골목골목을 따라 옛 건물들이 어우러진 풍경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살며시 불어와 이마에 맺힌 땀을 살짝 식혀주었다.


"멋지지?" 키캐가 내 옆에 서서 바람을 맞으며 미소 지었다.

"응 너무 아름다워. 고마워 키캐. 초대해 줘서."

"콘구스토. 네가 와줘서 내가 더 고맙지."


그때 타워의 커다란 종이 정오를 알리며 울려 퍼졌다. 깊고 낮은 종소리가 발렌시아 하늘에 퍼지며 마치 발렌시아에 온 나를 환영해 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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