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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랏빛향기

Somos Tres

by 북극곰

'댕~댕.'

환영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당 첨탑에서 내려왔다. 발렌시아 따뜻한 햇살이 가득한 거리를 지나 발렌시아의 심장, 중앙시장으로 발걸음을 옮다. 유서 깊은 발렌시아 중앙시장은 스페인과 발렌시아의 전통 음식과 식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곳으로 발렌시아에 온다면 꼭 가봐야하는 명소로 꼽힌다.


시장 입구에 다다르자, 아치형 철제 구조와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과 세라믹 타일 장식이 인상적이고 천장에는 발렌시아주의 상징적인 문양이 새겨져 있어 단순한 시장 그 이상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란, 바모스! 들어가자."


키캐와 함께 시장 안으로 들어서자 시장 특유의 활기를 느낄 수 있었다. 현지 주민들과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시장 안에서는 상인들의 능숙한 손길과 활기찬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발렌시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상큼한 향을 머금은 오렌지더미, 짭조름한 하몽과 신선한 해산물, 그리고 다양한 향신료와 건어물들이 어우러져 눈과 코를 사로잡았다.


"우와~"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니 작은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아란, 여기 천장 좀 봐. 여기는 20세기 초에 지어진 건물이야. 여기도 역시 무어인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곳이지. 스페인에서 가장 큰 전통시장 중 하나기도 하고 그 명성에 걸맞게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됐어."


키캐의 말을 듣고 나는 다시 한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돔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이 시장 안을 가득 채웠다. 순간, 누군가 가볍게 내 등을 두드렸다.


"아란~~ 서프라이즈~"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크리스티앙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발렌시아에서 한 시간 떨어진 곳에서 일하는 그를 저녁쯤에야 볼 수 있을 거라 예상했기에, 예상치 못한 만남은 더욱 반가웠다.


"아란! 웰컴 투 발렌시아, Que Tal? 디스 이즈 포 유."


그는 등 뒤로 숨겨둔 꽃다발을 내밀었다. 보랏빛 꽃들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오며 은은한 향기가 공기를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북적이는 시장 한가운데서 모든 소리가 음소거된 듯, 세상은 오직 우리만 존재하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선명한 색감, 은은한 향기, 꽃다발을 내미는 그의 따뜻한 손길까지 단 1초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에 넘실거리더니 식도까지 타고 나올 것 같았다.


산티아고가 끝나고 다시 만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발렌시아에 초대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대해준다는 사실이 가장 큰 선물이었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운 빨강머리 앤도 아닌데 꾸미지 않은 내 모습 그대로, 예쁘지는 않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가 이런 과분한 사랑을 받아도 될까? 이런 우정을 누릴 자격이 있을까?'


보라색 꽃향기를 깊게 들이마시자, 강수지 노래 '보랏빛향기'가 생각났다. 노래가사처럼 두 사람은 보랏빛향기처럼 내 곁으로 스며들었고, 그들의 반짝이는 눈동자에는 향기가 어려있었다. 길을 걷다 마주치는 사람들 중에 두 사람은 나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건네준 사람들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차올라 어떤 말로도 표현이 안될 것 같아 주저 없이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두 달 전 아쉬운 이별을 하고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몰라 불안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기쁨으로 뒤바뀌었다.


"초대해 줘서 고마워. 크리스티앙, 키캐"


"아란, 나 배고파."


크리스티앙이 배를 가리키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의 서툰 한국어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키캐도 장난스럽게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배를 가리켰다. 우리는 발렌시아 대성당 근처의 한 타파스집으로 향했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짙은 나무 향이 감돌고, 흥겨운 스페인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크리스티앙과 키캐를 본 직원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자리를 안내했다. 테라스 쪽에 앉으니 스페인 동부 발렌시아의 햇살이 우리 쪽을 비추고 있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맥주잔을 부딪히며 타파스를 즐기고 있었고 음식에서 풍기는 짭조름한 냄새가 우리의 코와 위를 더욱 자극했다.


"여기는 우리가 자주 오는 타파스집이야. 아란,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나는 사실 배가 그렇게 고프지 않은데, 추천해 주면 좋겠어."

"클라로."


두 사람은 내 취향에 맞게 홍합과 새우가 들어간 타파스를 주문하고 나를 위해 시원한 생맥주도 시켰다. 테이블 위에 작은 접시들이 하나 둘 채워지기 시작했다. 구운 바게트 위에 올라간 토마토와 올리브유, 치즈가 가득 들어간 한입 크기의 크로켓, 그리고 신선한 해산물 요리까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한상 가득 차려졌다. 우리는 산티아고 때처럼 맥주잔을 부딪치며 발렌시아에서의 재회를 축하했다.


"살룻"

"비엔베니도, 발렌시아"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 바삭한 크로켓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바삭하게 튀겨진 크로켓 안에는 다진 고기와 치즈가 고소한 풍미를 더해주어 맥주 안주로 제격이었다.


"근데 크리스티앙, 어떻게 온 거야? 일하는 중 아니었어?"


나는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아까 네가 발렌시아에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았어. 그냥, 잠깐이라도 보려고 달려왔지."


그의 하늘색 눈동자가 환하게 빛났고 날 항상 감동시킨다. 나를 잠깐이라도 보기 위해서 왕복 2시간을 운전해서 간디아에서 발렌시아까지 온 크리스티앙. 그는 멋쩍은 듯 웃으며 주제를 돌렸다.


"아! 그거 알아? 산티아고 끝나고 살이 빠진 줄 알았는데 오히려 4킬로나 쪘어!! 아마 이 맥주 때문이겠지?"


그는 맥주잔을 가리켰다.


"나도. 하루에 30킬로미터씩 30일 동안 걸었는데 3킬로가 쪘더라고." 내가 말하자 키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마 산티아고 끝나고 살찐 건 두 사람 밖에 없을 거야."


키캐가 크리스티앙을 가리켰고 크리스티앙은 입을 삐죽 내밀었고 크리스티앙은 배를 쑥 내밀며 웃었다.


"빤차(pancha, 똥배)"


우리는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두 달 만의 재회였는데도 어색함 없이, 어제 만난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걱정했던 감정의 공백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크리스티앙은 저녁에 다시 일하러 간디아로 향했고, 키캐와 나는 발렌시아 시내를 걸었다. 태양의 나라 스페인답게 골목마다 따뜻한 햇살이 스며들었고 광장 근처 카페에는 여유롭게 앉아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아란, 오르차타 마셔볼래?"

"오르차타?"


키캐는 익숙한 걸음으로 나를 한 작은 가게로 안내했다. 오르차타는 호두랑 비슷한 '추파'라는 식물을 착즙 해서 만든 발렌시아 전통음료로 맛도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 특징이었다. 우리는 오르차타와 함께 곁들여 먹는 빵, 빠르톤(parton)도 주문했다.


"한번 마셔봐." 키캐가 기대 어린 눈빛으로 내 반응을 살폈다. 나는 오르차타 한 모금마셨다. 부드러우면서도 은은하게 퍼지는 고소한 풍미가 입안에 감돌았고 어딘지 모르게 먹어본적 있는 친근한 맛이었다.


"음! 맛있어!! 예상보다 부드럽고 고소하네. 한국에 이거랑 비슷한 음료가 있어"

"정말? 발렌시아에서는 여름이면 대부분 사람들이 오르차타를 마셔. 특히 이 빠르톤을 찍어먹으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지."


키캐는 빠르톤 하나를 오르차타 컵에 풍덩 담갔다가 한입 베어 물었다. 나도 키캐를 따라 해 보았다. 빵에 스며든 오르차타가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늦은 오후의 발렌시아를 즐겼다. 바람이 살짝 불어와 머리카락과 야자수의 나뭇잎들을 흔들었고 길거리 악사의 기타 연주가 어딘가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오르차타 한 모금을 마시며 스페인의 여유로운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다시 'Somos Tres'가 되기 위해 크리스티앙이 있는 간디아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붉게 물든 하늘이 서서히 퍼져나갔다. 오렌지빛석양이 바다에 부서지듯 흐르면서 도로를 따라 늘어선 야자수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창밖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보았던 노을이 떠올랐다. 끝없는 길을 걸으며 함께 나누었던 대화들, 지친 발걸음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순간들, 그리고 헤어질 때의 아쉬움까지. 추억의 한페이지가 되었고 또 다른 추억을 만들기 위해 나는 여기, 발렌시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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