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암~' 기지개를 켜며 천천히 눈을 떴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 한 시. 어젯밤 마신 술 때문인지, 아니면 새벽 비행 탓에 피로가 몰려온 걸까? 이런저런 이유를 떠올리며 몸을 일으켜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자 크리스티앙도, 키캐도 보이지 않았지만 대신 어디선가 작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야옹~"
인절미 같은 줄무늬가 인상적인 루나가 꼬리를 곧게 세우고 다가왔다. 어제만 해도 숨기 바빴는데 오늘은 먼저 다가와 가볍게 울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 네가 루나구나."
익숙한 이름이었다. 산티아고를 함께 걸을 때 크리스티앙이 들려준 이야기 속 주인공. 마트에서 장을 보고 짐을 싣던 순간, 문이 열린 차 안으로 갑자기 뛰어든 작은 고양이 루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그는 망설임 없이 루나를 집으로 데려왔고 첫 만남이 월요일이라 '루나'라는 이름을 지어줬다고 했다.
"야옹~"
루나는 경계하는 듯하면서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소파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앞발을 천천히 뻗었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몸을 길게 몸을 늘어뜨리며 무심한 척 등을 돌렸다.
'알다가도 모르겠다.'
사람과도 이렇게 밀당을 하지 않는데 고양이와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 퍽 우습게 느껴져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란, 뭐가 그렇게 재밌어?"
2층에서 내려오던 키캐가 나를 보며 물었다.
"굿모닝, 키캐. 그냥.. 루나랑 놀고 있었어. 크리스티앙은?"
"회사 갔어. 오전 근무만 하고 올 거래."
키캐는 부엌으로 향하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란, 냉장고가 텅 비었어. 마트에 갈 건데 같이 갈래?"
"오. 좋아. 안 그래도 장 좀 봐야 했는데."
"뭐 사려고?"
"김밥 재료. 코리안 스시라고도 불리는데 밥 위에 야채나 계란을 넣고 돌돌 만 음식이야. 전에 한번 만들어 주려다 실패했는데 오늘은 제대로 만들어줄게."
"김밥기대된다."
산티아고에서 히라다상이 선물로 준 김으로 두 사람에게 김밥을 만들어 주려고 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재료도 부족했고 실력도 따라주지 않아 결국 볶음밥으로 대신해야 했다.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몰라 당황했지만 크리스티앙과 키캐는 볶음밥을 김에 싸 먹으며 맛있다고 웃던 모습이 미안하면서도 고마워 늘 마음에 걸렸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제대로 김밥을 만들어 대접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는 길 건너 대형 마트에 들어섰다. 자연스럽게 진열대를 둘러보는 키캐와 달리, 나는 한동안 낯선 진열대를 구경하는 데 정신이 팔렸다. 한국에서는 당연하게 여겨졌던 재료들이 여기서는 찾기 어려웠고, 반대로 한국에서는 귀했던 식재료들이 저렴하게 진열된 모습이 신기했다. 특히 한국에서는 비싸게 팔리던 올리브오일이 이렇게나 저렴하다니.
"천천히 둘러보면서 재료를 골라 보자." 키캐가 장바구니에 샐러드용 야채를 넣으며 말했다. 예민하면서도 세심하게 배려를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방긋 미소 지었다. 마트에서 돌아오자마자 키캐는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향했다.
"키캐, 내가 도울 일은 없을까?"
"음.. 아란.. 고단 했을 텐데 쇼파에서 앉아서 좀 쉬어. 발렌시아를 만끽하라고."
엄마처럼 다정다감한 키캐는 늘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헤아렸다. 그래서 고맙고 미안했다. 그는 능숙한 손길로 연어파스타와 신선한 샐러드를 준비했다. 키캐가 점심을 준비하는 동안 크리스티앙이 퇴근해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마주 앉아 점심을 먹고 크리스티앙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 놓을 인테리어 소품을 고르기 위해 골동품 가게로 향했다.
테이블과 의자 같은 가구부터 주방용품, 엔틱 한 인테리어 소품들까지. 가게 안은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크리스티앙과 키캐는 진지한 표정으로 소품을 고르고 나는 조금 뒤처져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가끔 두 사람은 뒤를 돌면서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내 앞에 나타나 웃음을 터뜨리게 했다. 그들의 장난에 피곤했던 몸이 한결 가벼워지는 듯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땅거미가 지고 창밖은 어둑어둑해졌다. 우리는 9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왔다.
"자 이제 김밥을 만들어볼까?"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주방으로 향했다. 쌀을 씻어 밥을 짓고, 재료를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손질했다. 계란을 풀어 지단을 부치고, 오이와 당근을 곱게 채 썰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뒤 크리스티앙을 놀려주려 조용히 그의 뒤로 다가갔다.
바로 그때였다.
우당탕!
"아....!"
발에 차인 유리 화병이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김밥은 둘째치고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불과 몇 시간 전 골동품 가게에서 보고 온 물건들이 떠올랐다. 혹시 비싼 거였으면 어쩌지?
"미안해. 정말.. 내가 사고뭉치네. 정말 정말 미안해.. "
크리스티앙은 아무 말 없이 휴대폰을 들었다.
찰칵.
그는 내 놀란 표정을 사진으로 찍고 있었다. 키캐는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아란. 그건 단지 유리일 뿐이야. 지금이 순간 제일 중요한 건 지금 우리가 발렌시아에 함께 있다는 사실이야."
그 말에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어떻게든 보상해야 할 것 같아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내가 보상할게.. 정말 미안해."
크리스티앙은 곰곰이 생각하는 척을 하며 턱을 괴더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란, 보상하는 방법이 딱 하나 있기는 해." 그 말에 키캐와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빨리 김밥 만들어줘. 나 배고파."
그제야 나도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이 깨진 화병 조각을 치우는 동안 나는 다시 주방으로 돌아가 김밥을 말기 시작했다. 김발에 김을 깔고 밥을 넓게 펼친 뒤 재료를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올렸다. 돌돌 말아 써어보니 제법 그럴듯했다. 크리스티앙과 키캐도 주방에 오더니 호기심 많은 크리스앙이 말했다.
"아란. 나도 해보고 싶어. 내가 싸도 돼?"
"그럼, 당연하지. 우리 내기하자. 가장 못생기게 싼 사람이 내일 커피사기."
"좋아!"
내가 먼저 시범을 보였고 두 사람도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김밥을 말기 시작했다. 크리스티앙은 눈에 불을 켜고 집중했고, 키캐는 세심한 성격처럼 세심하게 김밥을 쌌다. 그런 데 나보다 더 잘하는 것 같았다.
결국 발렌시아 김밥 대회에서는 내가 꼴찌를 했다. 그렇게 서로의 김밥을 먹으며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산티아고에서 처음 만났던 순간, 두 사람이 성정체성을 밝혔을 때의 기분 그리고 헤어졌던 그날의 감정들까지.
서로의 말이 완벽하게 통하지는 않아도 우리는 완벽하게 서로를 이해했다. 말하지 않아도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눈빛만으로 알 수 있었다.
함께 걷던 그때 처처럼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눈을 뜨고 함께 장을 보고,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이야기하다가 잠들었다. 헤어진 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간절한 바람과 기도가 이루어졌다. 다가올 이별이 슬프고 두려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 생각을 미뤄 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