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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아달레스트

그때처럼

by 북극곰

토요일 아침, 오늘은 크리스티앙도 쉬는 날이다. 우리는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을 먹고 발렌시아 근교로 나들이를 가기로 했다. 거실로 나가니 키캐의 부모님이 싸주신 빵과 두유를 넣은 카페콘레체가 식탁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산티아고 때처럼 오늘도 두 사람이 내 아침을 챙겨주었다.


"아란, 굿모닝. 디스 이즈 포 유." 크리스티앙이 두유가 들어간 커피를 건네며 웃었다.

"무차스 그라시아스."

"아란, 오늘 우리는 구아달레스트에 갈 거야."

"구아달레스트?"

"작은 산악 마을인데 중세 시대 요새와 거대한 저수지를 볼 수 있어. 유럽 사람들이 휴가철에 많이 찾는 여행지인데 분명 너도 마음에 들걸?"


아침을 먹고, 우리는 차를 타고 길을 나섰다. 하지만 전날 과음한 탓에 숙취가 올라와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아란, 오픈 유어 아이즈!"

크리스티앙이 백미러로 나를 보며 말했다.


"미안, 속이 좀 안 좋아서"


두 사람이 준비한 계획을 팔라스데이에서처럼 망칠 수 없다는 생각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눈을 떴다. 차는 점점 산길로 이어졌고 창문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길 양옆으로 끝없이 펼쳐진 올리브 나무들이 부드러운 바람에 일렁이고 있었다.


삼십 분쯤 달렸을까? 저 멀리 거대한 절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햇빛을 머금은 바위산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고, 그 아래로 작은 마을이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우리는 차를 세우고 마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돌바닥이 이어졌고, 흰 벽의 집들은 창문마다 형형색색의 꽃이 달려있었다. 내가 알던 스페인의 여느 마을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이색적이면서도 매력적인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란, 디스 이즈 구아달레스트!!"

"우와... 발렌시아랑 느낌이 정말 다르네."

"그치, 그래서 스페인 사람들도 여행으로 많이 오는 곳이기도 해. 그리고 여기는 고도가 높아 추울지도 모르니까 가디건 꼭 챙겨."

"크리스티앙, 나는 지금 너무 더운걸?"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의 조언을 흘려 들었다.


산길을 따라 걷다 보니 끝없는 계단이 이어졌다. 마지막 계단을 오르니 눈앞에 장관이 펼쳐졌다. 거대한 에메랄드빛 저수지가 태양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우와" 절로 감탄이 나왔다.

"멋지지? 우리도 여기가 처음이야." 키캐가 말했다.


크리스티앙도 조용히 경치를 바라보며 감탄하는 듯했다. 저수지뿐만 아니라 멀리 펼쳐진 산맥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살짝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니 머릿속이 개운해지는 듯했고 차가운 가을바람이 두 뺨을 스쳤다.


크리스티앙과 키캐는 나에게 더 좋은 풍경을 보여주고, 더 특별한 경험을 선물하기 위하여 먼 길을 달려왔다. 그들의 배려와 정성이 곳곳에서 묻어났다. 오랜만의 만남에 보여주고 싶은 것도, 함께하고 싶은 것도 많았던 모양이다. 그 마음이 에메랄드빛 저수지보다 더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Somos Tres. 우리는 세명입니다.


산티아고 때처럼 우리는 다시 셋이 되었다. 우리 셋은 아무 말 없이 잠시 넋을 잃고 눈앞에 펼쳐진 멋진 경치를 감상했다. 말하지 않아도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저수지와 산맥이 우리의 침묵을 포근히 안아주는 기분이었다.


"여기 정말 멋진 곳이다! 초대해 줘서 고마워."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콘 구스또. 우리도 너랑 와서 더 좋았어."

"우리 사진 찍을까?"

"좋아."


우리는 저수지를 배경으로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다. 함께 찍은 사진 속에는 두 달 전 순례길에서처럼 같은 곳을 바라보고 환하게 웃고 있는 우리가 있었다.


순간, 순례길의 추억이 떠올랐다. 뜨거운 태양 아래 먼지를 뒤집어쓰며 걸었던 길, 지칠 대로 지쳤지만 함께였기에 버틸 수 있었던 순간들, 그리고 도착한 산티아고에서 마주한 서로의 미소. 그때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가 이렇게 다시 함께 서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고 뭉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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