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아달레스트 전망대에서 내려와 기념품 가게를 잠시 둘러본 뒤, 우리는 알테아라는 마을로 향했다. 이곳에서도 동양인들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스페인 작은 마을이었다. 발렌시아 대성당처럼 파란색 돔이 인상적인 알테아 대성당과 하얀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있는 좁은 골목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하얀 벽과 모로코양식의 파란색 돔은 그리스와 스페인 전통 분위기를 동시에 품고 있었다.
하지만 낭만적인 마을과는 달리 크리스티앙과 키캐의 사이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갑기만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언성을 높이며 언쟁을 벌였고, 서로를 의식한 듯 일정한 거리를 두고 걸었다. 언어는 기세와 눈치가 아니던가. 언어를 몰라도 분위기는 읽을 수 있는 법이다. 어색한 기운을 감지한 나는 크리스티앙에게 슬쩍 다가갔다.
"크리스티앙, 여기 너무 멋지다. 데려와 줘서 고마워."
"네 기쁨이 나에게는 가장 큰 선물이야."
늘 결같이 큰오빠처럼 다정한 그의 말투였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이 평소처럼 가볍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혹시 키캐랑 무슨 일 있어? 키캐의 표정이 너무 안 좋아 보여.."
"노 프라블럼, 아란! 아무것도 아니야. 괜히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해."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야, 크리스티앙. 그냥 단지.. "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크리스티앙은 앞서 걷던 키캐에게 다가가 스페인어로 말했다. 그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키캐의 표정은 오히려 더 굳어졌다. 나는 둘 사이의 긴장감이 더 깊어지는 걸 느끼며 키캐에게 다가갔다.
"키캐, 무슨 일 있어?"
"크리스티앙한테 혹시 무슨 말했어?"
키캐의 질문을 듣자마자 눈치 없이 내가 괜한 소리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나는 두 사람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배트맨 흉내도 내며 두 팔을 펼쳤다. 두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다시 'Ole'하고 외치며 알테아의 좁은 골목길을 뛰어다녔다. 작은 광장 한복판에서 플라멩코 동장을 따라 하기도 했다. 우스꽝스러운 내 몸짓으로 지나가던 몇몇 관광객들이 흘깃 쳐다보았지만 두 사람이 웃을 수만 있다면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은 내 모습을 보고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바보 같아."
"정신없지만 재밌긴 했어."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박장대소했다. 그제야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진 듯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제넘은 참견일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두 사람이 화해했으면 좋겠어."
"미안해, 신경 쓰게 해서. 하지만 별일 아니야."
"정말이지?"
두 사람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마을을 둘러보았고, 어느새 발렌시아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왔다. 차로 발길을 돌리는 순간 크리스티앙이 나를 불렀다.
"아란, 여기는 향초를 만드는 가게야."
"우와~ 멋지다.!!"
크리스티앙은 동양 문화에 관심이 있는 동시에 향초, 인센스 등에도 관심이 참 많아 집에서도 자주 향을 피우곤 했다. 가게로 들어서자 직원이 나이프로 정교한 조각을 하며 향초를 만들고 있었다. 크리스티앙은 그녀와 몇 마디 주고받더니, 직원은 내게 관심이 생긴 듯 작품을 만들며 물었다.
"어디에서 왔어요?"
"쏘이 꼬레아나.(한국인이에요.)"
나는 스페인어로 대답했고, 크리스티앙이 옆에서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꼬레아나? 저스트 꼬레아나? 꼬레아나? 정말?? 정말???"
그는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 표정을 보자 산티아고에서 함께 걸었던 그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아란, 누가 어디 출신이냐고 물으면 한국사람이자 발렌시아 사람이라고 대답해야 해.'
그때, 우리는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했었지만, 두 달이 지난 지금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소이 꼬레아나 이 발렌시아나"
그제야 크리스티앙은 만족한 듯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발렌시아에서의 시간은 우리에게도 특별했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