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시아의 마지막 아침이 밝았다. 간절했던 두 사람과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함께했던 시간도 서서히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른 아침, 테라스에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따스한 햇살이 피부를 어루만졌고, 맑고 투명한 하늘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골웨이의 구름 낀 하늘과는 달리, 이곳의 하늘은 너무나도 깨끗하고 선명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스페인의 공기를 다시 한번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돌아보니 크리스티앙과 키캐가 2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이른 주말 아침인데도 크리스티앙은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친 모습이었다. 계단을 내려오던 그가 나를 발견하고 테라스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굿모닝, 아란."
"굿모닝, 크리스티앙."
"여기서 뭐 해?"
"스페인의 마지막 아침을 음미하는 중이야."
그도 테라스로 걸어 나와 나란히 섰다. 쾌청한 발렌시아의 하늘이 우리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끝없이 펼쳐졌다.
"그런데 크리스티앙, 어디 가려고?"
"응, 아버지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아. 조금 편찮으셔서 입원 중이시거든."
"괜찮으셔?"
"조금 안 좋긴 한데 심각한 건 아니야."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덧붙였다.
"혹시 괜찮으면 같이 병문안 가지 않을래? 네가 간다면 아버지도 좋아하실 것 같아."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는 것도 큰 힘이 되지만, 누군가에게 일말의 작은 용기를 줄 수 있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영광이지. 같이 가자."
키캐는 집에 남기로 했고 크리스티앙과 함께 길을 나섰다. 병원에 가기 전, 크리스티앙의 어머니를 모시러 부모님 댁에 들렀다. 차로 10분 남짓 달려 도착한 집은 주황색 지붕이 인상적인 아담한 2층짜리 주택이었다. 넓은 정원에는 키 큰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고, 가지마다 주렁주렁 탐스럽게 열린 오렌지가 따뜻한 발렌시아의 햇빛을 받고 있었다.
"아란, 우리 어머니는 연로하셔서 다리가 좀 불편하셔.. 음.. 원래 집이 2층이고, 1층은 차고로 썼는데 계단을 오르내리기 어려우셔서 차고를 집으로 개조해 드렸어."
크리스티앙이 차에서 내리며 설명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백발의 여성이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내 앞에는 검은 니트 셔츠에 빨간 치마, 금빛 귀걸이까지 갖춘 모습이 세련되고 기품이 넘치는 백발의 여성이 서있었다. 그녀의 하늘색 두 눈이 나를 향했다. 동양인을 처음 본다는 그녀는 살짝 놀란 듯했지만 이내 반갑게 미소 지었다.
크리스티앙은 장난스럽게 나를 '산티아고에서 만난 스트롱걸'이라고 소개했다. 나는 스페인어로 정중하게 인사를 드렸다.
"엔깐따다. 메 야모 아란, 소이 꼬레아나 이 발렌시아나."
마법의 단어 '발렌시아나'라는 말에 크리스티앙과 그의 어머니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크리스티앙은 어머니의 짐을 싣고 있었고 그는 내 손을 살며시 잡으며 집 안쪽을 가리켰다. 나는 그녀를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집안 곳곳에 크리스티앙과 부모님이 함께 꾸려온 삶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는 손을 놓지 않은 채 천천히 집안을 안내했다 거실 한쪽 벽에는 크리스티앙과 그의 누나의 어린 시절 사진들이 가지런히 걸려있었다. 밝은 미소를 짓고 있는 천진난만한 소년의 얼굴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했다.
그녀는 소파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손짓한 뒤 느릿한 걸음으로 책장에서 얇은 앨범 하나를 꺼내 내 옆에 앉다. 빛바랜 앨범 커버를 펼치자 어린 시절 크리스티앙과 젊은 시절 그녀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카메라를 응시하는 바가지 머리를 한 소년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은 두 달 전 산티아고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크리스티앙과 닮아있었다. 나는 사진 속 아이가 지금도 그때처럼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추억에 빠진 듯 조용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비록 그녀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눈빛과 손끝에서 흐르는 감정만 충분히 전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크리스티앙이 편견 없이 사람을 대하고 사랑을 베푸는 이유를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대문 밖에서 우리를 흘끗 바라보던 크리스티앙이 다 끝냈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간디아에 있는 한 병원으로 이동했다. 병원에 도착한 후 어머니는 먼저 병실로 먼저 들어가고 나는 크리스티앙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디가 편찮으신지 물어봐도 돼?"
"응, 별건 아니고 당뇨인데 며칠 후면 퇴원하실 거야."
병실 문을 열 자 산소호스를 꽂은 그의 아버지가 침대에 누워 계셨다. 분명히 크리스티앙은 큰 병이 아니라고 했지만 병원에 누워 계신 아버지는 힘없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를 보자 미소를 지으며 반겨주었다. 크리스티앙은 아버지에게 나를 소개해주었다.
"아란, 우리 아버지 셔."
"올라, 엔깐따다. 메야모 아란, 쏘이 꼬레아나 이 발렌시아나."
그가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말하자 그의 아버지는 빙긋 미소 지으며 나를 환영해 주었다. 크리스티앙은 부모님과 나 사이에서 통역사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지만 나는 부족하더라도 손짓과 표정을 최대한 활용하여 최대한 스페인어로 대화하려고 노력했다.
"빠빠, 뚜 빠에야 무이 무이 부에노, 께 리꼬.(크리스티앙이 아버지 빠에야가 제일 맛있다고 했어요."
손짓 발짓을 동원해 말하자 그의 아버지는 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크리스티앙에게 숨을 헐떡이며 무언가를 말했다. 크리스티앙은 웃으며 그가 한 이야기를 전해주었고 그의 아버지는 나를 인자한 미소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란, 아버지가 퇴원하시면 직접 빠에야를 만들어 주시겠대. 발렌시아에 다시 오라고 하셔."
나는 그의 아버지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물론이죠, 또 올게요. 그때까지 건강하셔야 해요."
마침 병원 점심시간이 다가와 어머니는 병실에 남고, 우리는 조용히 인사를 드린 후 밖으로 나왔다. 문이 닫히 크리스티앙은 한숨처럼 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높고 맑은 발렌시아의 하늘은 오전과 변함이 없었다.
"아란, 고마워."아버지께 큰 위로가 됐을 거야."
"콘 구스또. 오히려 내가 감사하지. 부모님 덕분에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었잖아. 그런데 아버지 많이 편찮아 보이시는데 괜찮으신 거야?"
"사실 잘 모르겠어. 근데 한가지 분명한 건 오늘은 매우 행복해 보이셨어. 네 덕분에."
"어게인, 콘구스또! 키캐와 네가 산티아고에서 나에게 베풀어준 친절만큼 나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하고 행복해. 크리스티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