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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발렌시아 오렌지나무

푸른 오렌지의 비밀 

by 북극곰 Mar 16. 2025

 집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정리했다. 더블린행 비행기는 오후 9시 출발이었지만 점심을 먹고 공항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아침에 미리 짐을 정리해 둔 덕분에 오래 걸리지는 않았지만 막상 떠난다고 생각하니 왠지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크리스티앙과 키캐의 이별도, 정들었던 크리스티앙의 게스트룸과 작별을 고해야 할 순간도 다가오고 있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3박 4일 동안 내 보금자리가 되어준 방을 한번 둘러본 뒤, 깊은숨을 내쉬고 문을 나섰다. 


"바모노스!" 


 아쉬운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괜스레 밝은 목소리로 두 사람을 향해 외쳤다. 두 사람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나의 가방을 들어주었다. 


"오늘 점심은 빠에야야." 크리스티앙이 트렁크에 가방을 싣으며 말했다.


"빠에야의 본고장인 발렌시아에서 빠에야는 먹고 가야지, 안 그래?" 


그제야 생각났다. 발렌시아에 오면서 하고 싶었던 두 가지. 한 가지는 빠에야를 맛보는 것, 또 하나는 오렌지 농장에 가서 발렌시아 오렌지를 맛보는 것이었다. 오렌지 농장에도 가보고 싶었지만 두 사람이 잊어버린 듯했다. 발렌시아 오렌지 맛이 궁금했지만 아이가 마트에서 장난감 사달라고 조르는 것 같아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식당으로 향하는 차 안, 따사로운 발렌시아의 햇살과 부드러운 진동이 나른하게 어깨를 감싸 안았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거리 풍경을 바라보다 보니 어느새 눈꺼풀이 무거워져 나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아란, 내려."  


 크리스티앙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그런데 우리가 도착한 곳은 식당이 아니었다. 키 높이 정도 되는 푸른 나무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늘 한 점 없이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스페인 태양이 더 강렬하고 뜨겁게 느껴졌다. 


"도착했어? 여기가 어디야?" 


 아직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눈을 비비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크리스티앙의 오렌지농장이었다. 농장은 크지 않았지만 사람 키만 한 오렌지 나무들과 허리 높이의 묘목들이 가지런히 줄지어 서 있었다. 발렌시아의 따스한 햇살 아래 탐스럽게 매달린 주황빛 오렌지들이 금빛으로 반짝였고 싱그러운 오렌지 향이 가득한 공기 속에서 나는 신기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웰컴 투 마이 오렌지 하우스" 

크리스티앙은  웃으면서 내게 쇼핑백을 하나 건넸다. 


 기억을 못 하는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은 내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여행의 마지막을 특별하게 장식하기 위해 이곳을 준비해 둔 것이었다.  키캐는 손가락으로 나무들을 가리켰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초록빛 나무들 사이로 익어가는 탐스러운 오렌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음껏 따서 담아." 


 나는 신난 마음으로 황금빛 오렌지들을 쇼핑백에 담기 시작했다. 달큼하고 상큼한 향기를 맡으며 따고 있는데 크리스티앙이 다가와 쇼핑백을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는 내 손을 잡고 나를 조금 더 안쪽으로 데려갔다. 그가 가리킨 나무에는 아직 익지도 않은 시퍼런 오렌지들이 매달려 있었다. 


"여기 있는 게 맛있어." 


 나는 당황했다. 주황빛으로 익은 오렌지가 더 달고 맛있을 것 같은데 푸른 오렌지를 따라고 하니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오렌지 농장 주인이자 친구의 말을 믿기로 하고 조심스레 푸른빛이 도는 오렌지를 하나 땄다. 


"저 오렌지보다 이게 정말 맛있는 거 맞아?" 살짝 의심의 눈초리로 크리스티앙을 바라보며 방금 딴 오렌지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럼, 아까 병실에서 아버지께 여쭤보고 알려주는 거야. 이 나무에 있는 오렌지가 제일 맛있다고 하셨거든." 


 그의 아버지는 입원하기 전까지 오렌지 농장을 직접 관리하셨다. 병원에 입원한 후로는 어머니와 고모, 크리스티앙까지 온 가족이 농장을 돌보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나의 의심을 덜어주려는 듯 나무에서 가장 파란 오렌지를 하나 따서 능숙한 손길로 껍질을 벗겼다. 그리고 삼등분하여 키캐와 나에게 나누어주었다. 반신반의하며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예상과 달리 오렌지는 씁쓸하거나 떫지 않았다. 입안 가득 퍼지는 향긋함과 상큼함, 그리고 예상치 못한 달콤함이 어우러졌다. 나는 놀라서 크리스티앙을 바라보았다. 


"어때?" 그가 묻자 나는 감탄하며 두 개의 엄지를 치켜들었다.


"진짜 너무 맛있어! 아직 안 익은 줄 알았는데 이 오렌지는 이미 다 익은 거구나." 


그때 키캐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란, 마치 네 인생 같아."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내 인생?" 

"비록 어리지만 산티아고도 걷고, 피부색이 다른 두 오빠도 생기고, 오렌지 농장도 갖고 있잖아. 겉으로 보기에는 어리숙해 보여도, 속은 이 오렌지처럼 새콤하면서도 달콤한 경험과 매력을 가득 품고 있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잖아."  


"그래, 나는 두 사람 덕분에 이미 특별한 사람이야. 고마워."

"자, 이제 마지막으로 빠에야를 먹으러 가자." 크리스티앙이 말했다.


우리는 차를 다시 타고, 발렌시아의 전통을 맛볼 준비를 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든 걱정을 잠시 접어두고, 함께 나누는 순간에 집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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