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시아에서 간디아로 향하는 길. 붉게 타오르던 노을은 어느새 사그라지고 하늘은 검푸른 어둠에 잠겼다. 그 사이로 둥글고 환한 보름달이 떠올라 우리의 길을 은은하게 비추다. 부드러운 달빛이 차창을 타고 나에게 스며들자 마치 달빛마저 나를 환영해 주는 듯한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기분 좋은 설렘으로 한 시간 남짓을 달려 크리스티앙의 집에 도착했다.
'띵동 띵동~ '
초인종을 두 번 누르자 문이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반겼다.
"롱 타임 노 씨. 웰컴 투 마이 하우스."
크리스티앙은 특유의 너스레를 떨며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활짝 웃어 보였다. 복층으로 된 그의 집은 1층에는 거실과 주방, 게스트룸, 테라스가 자리 잡고 있었고 2층에는 그의 침실과 넓은 테라스가 있었다. 동양문화에 관심이 많은 크리스티앙답게 중국에서 사 온 목제 가구와 도자기, 이탈리아에서 공수 유니크한 조명,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집안 곳곳이 장식되어 있었다. 언발란스하면서도 발란스가 이루는 그의 집은 따뜻하고 아늑했다.
두 사람은 내가 꿈꾸던 이상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크리스티앙은 자신이 설계한 아파트에 여유로운 삶을 만끽하며 살고 있었다. 산티아고 걸을 때 '아란, 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을 쌓는 거야.'라고 말하던 그의 말대로 그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었다. 키캐 역시 부모님의 빵집을 함께 운영하며 소소하지만 행복한 보내고 있었다.
반면에 나는 늘 가슴 한편에 불안이라는 꺼지지 않는 씨앗을 품고 있었다. 오늘을 온전히 살지도, 내일을 계획하지도 못한 채 어중이떠중이처럼 떠도는 기분. 산티아고에서는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같은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친구가 될 수 있었지만 그 길이 끝난 후에는 각자 다른 이정표를 보고 걸어야 한다는 사실이 문득 두려워졌다. 두 사람은 자신들만의 길을 굳건히 걸으며 자신만의 공간에서 삶을 즐기는 크리스티앙,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뿌리내린 삶을 살아가는 키캐. 그들과는 너무 다른 나.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어디로 가야 할지조차 모르는 내가 그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지는 않을까.
'결국엔 우정도 끝나버리겠지.'
나 자신에게 실망한 그들이 자연스레 나와 멀어질 거라고 생각하자 씁쓸한 기분이 밀려왔다. 문득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길 위에서는 그저 같은 목적지를 향해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이제는 각자 다른 목적지를 향해 걸어야 한다. 그리고 그 끝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그들의 완벽한 삶에 불청객처럼 끼어드는 기분이 들어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웃으며 나를 반겼다. 마치 그저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것처럼. 그들의 환한 미소를 보며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래, 지금은 이 순간을 즐기자.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불안은 여전히 가슴속에 남아있었지만 설렘이라는 감정을 더 앞세우기로 했다.
"아란, 무슨 생각해?"
"나다, 나다, 아니야, 아무것도."
"mi casa es tu casa. 우리 집이 네 집이야. 편하게 있으면 돼."
두 사람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게스트룸 문을 열며 말했다.
"그라시아스."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짓고 방 안을 둘러본 후 옷을 갈아입었다. 두 사람을 위해 준비한 선물인 하회탈과 도시락, 젓가락을 들고 거실로 나가자 크리스티앙이 반갑게 나를 바라보았다.
"크리스티앙, 키캐! 다시 한번 초대해 줘서 고마워."
"콘 구스또, 아란! 네가 발렌시아에 있다니 믿기지 않아. 와줘서 고마워."
나의 방문이 오히려 그들에게 기쁨이 되었다는 말, 솜사탕보다 더 달콤한 그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뒤에 감추고 있던 선물을 내밀었다.
"디스 이즈 포 유, 이건 크리스티앙, 이건 키캐."
엉성하게 포장된 선물을 기쁘게 뜯는 그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고 나도 그들을 따라 미소 지었다. 선물을 받고 아이처럼 좋아하는 두 사람을 보니 잠시 스쳐갔던 걱정과 불안감은 눈 녹듯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나'라는 존재가 존재만으로 누군가에게 큰 기쁨과 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 두 사람을 통해서 배우게 되었다. 그들 역시 내 인생의 큰 선물이었다.
"아란, 저녁 해줄 건데 뭐 먹고 싶어? 치킨샐러드 아니면 빵이랑 하몬?"
"음.. 치킨샐러드!!"
배가 그리 고프지 않아 치킨샐러드를 택했지만 이게 코스요리일 줄은 몰랐다. 하몽, 치즈, 햄과 와인이 애피타이저로 나왔고 본 식으로 치킨샐러드가 나왔다. '치킨'과 '샐러드'가 따로 나오는 방식에 절로 웃음이 났다. 산티아고에서는 맥주를 마셨지만 발렌시아에서는 재회를 축하하며 와인잔을 기울였다.
"살룻"
"살룻, 아란 웰컴 투 발렌시아. Mi Casa Es Tu Casa."
크리스티앙은 와인잔을 기울이며 다시 한번 나에게 말했다. 그의 집이 그리고 이 순간이 나에게 안식처가 되길 바라는 듯 그의 눈동자는 오늘도 반짝였다. 힘들고 지칠 때 늘 나의 나침반이 되어주는 확신의 찬 그 하늘색 눈동자.
두 사람은 2층으로 올라가고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잠이 오지 않아 다시 거실로 나왔다. 테라스의 문을 조심스레 열고 밖으로 나가니 차가운 공기가 내 안으로 들어왔고 달빛이 비치는 테라스에 나와 서니 선선한 바람이 볼을 스쳤다.
‘나도 그들처럼 웃을 수 있을까?’
문득 고개를 돌려 하늘을 올려다봤다. 보름달이 여전히 길을 비추고 있었다. 그 빛 아래에 서 있으니 조금 전까지 나를 짓누르던 불안감이 사그라드는 듯했다. 산티아고의 길 위에서도 나를 비추던 달빛이었다.
‘길은 계속된다.’
불안은 여전히 가슴속에 남아있지만, 이 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크리스티앙과 키캐처럼 오늘을 온전히 살아보기로.
“아란, 여기서 뭐 해?” 고개를 돌리자 키캐가 슬며시 문을 열고 다가왔다. “그냥… 바람 좀 쐬고 있었어.” “그러기엔 너무 멀리 떠나 있던 얼굴인데?”
그의 농담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키캐는 나란히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일은 뭐 하고 싶어?” “음… 글쎄. 특별히 정한 건 없어. 그냥 너희랑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