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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드형 Sep 05. 2022

태풍 오던 날, 울릉도 가는 배를 탔다

무모했던 추석 여행의 추억

가자


짧은 한마디에 끌렸다.


대학 1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여행 동아리에 들어가 처음 떠난 8박 9일 장기 캠핑에서

우연히 친해진 W란 친구가 있었다.


작은 키지만 다부진 체격에

웃을 때 한없이 착해 보이는 선한 인상.

술 좀 들어가면 실패한 짝사랑 얘기로 시작해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로 음치의 끝을 보여주던

궁상 로맨티시스트.


뭔지 모르게 친근함과 동정심을 유발하는 그 친구가

추석 연휴를 앞둔 어느 날 술 먹다 대뜸,

가자.
어딜?
울릉도.
태풍 온다는데?
그래도 가자.
그럴까...


그렇게 홀린 듯 무작정 떠난 여행이었다.




새벽차를 타고 묵호항으로 갔다.

하지만 배가 없었다.

울릉도 가는 배 없나요?
고장 나서 수리하러 갔죠.
어디로요?
네덜란드.
네? 언제 오는데요??
내년에.
...


다시 차를 타고

동해안을 따라 포항으로 갔다.

울릉도 가는 배 없나요?
오늘 못 가요.
왜요?
태풍 온다잖아요.
그럼 언제 갈 수 있어요?
내일 봐서.


"여행이 다 그렇지 뭐. 술이나 먹자..."

포항이 고향이라 내려와 있던 동아리 선배 A를 불러내

거하게 한잔 얻어 마신 후,

여행 첫날의 밤을 그렇게 보냈다.


간대


태풍의 영향으로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지만

울릉도로 추석 쇠러 가는 사람들을 위해 배가 뜬다 했다.


그렇게 긴 시간을 배 타본 적 없는 우리는

가는 내내 선실 밖에서 울렁거리는 속을 참아야 했다.


배낭 여행족으로 보이는 한 외국인 여성은

능숙한 솜씨로 판 구조물 사이로 해먹을 설치해 누워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얼마나 갔을까...

저 멀리 도동항이 보이고

서울을 무작정 떠난 지 이틀 만에 우린 드디어

울릉도에 도착했다.


설레기 시작했다.




울릉도 보낸

하룻밤 이야기를 해야겠다.

(사실 한마디로 개고생만 하다 왔다)


젊은 혈기에 노숙을 하려고 침낭만 챙겨 왔는데

비가 계속 내리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한 초등학교를 찾았다.


마침 당직을 서시던 교감 선생님이

비 쫄딱 맞고 찾아온 우리에게 교실 공간을 내주셨다.


음에는 간첩이 아닌가 의심하는 눈초리였지만

학생증을 내 보이며 사정하자,

명절 때 조상도 안 모시고 놀러 온 철부지 대학생 둘을

한참 훈계하시더니 이내 미안하셨던 모양이다.


귀신 나올 거 같이 썰렁한 골마루 복도에서

라면을 끓여 먹고 침낭 속에 들어가서


'집 떠나면 고생이다'


원한 진리를 몸소 체험하고 있는데...


학생들 자나?
아뇨.
저녁은 먹었나?
네, 라면 먹었어요.
그럴 줄 알았지. 이리 와 봐.


아까 그 호랑이 교감 선생님을 따라

다른 교실에 들어서니


"어서 와요"


어른과 아이 몇 명이 모여 있고

그 앞에 커다란 잔치상 같은 게 차려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온통 오징어로 만든 음식들.


얘기를 들어 보니

육지에서 오신 선생님 몇 분이 태풍으로 배가 안 떠

고향에 못 가시게 돼서 학부모들이 마련해 준 거라 했다.


한창나이에

배고픔과 추위로 떨고 있는

서울에서 온 대학생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은

후한 인심에 아까의 후회와 서러움은 어느새 사라졌다.


정신없이 배불리 먹고

돌아와 누워 잠들며 또 생각했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


다음 날,

태풍이 지나갔는지 하늘이 무척 맑았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태풍 같은 자연재해를 완벽하게 피할 수 없듯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결코 피할 수 없는 괴로운 것들이 살면서 참 많다.


하지만 늘 그렇듯


태풍은 지나가고

인생의 고난도 언젠간 끝난다.


그리고

막상 지나 보면

그렇게 힘들었던 일 조차도

나를 더 성장하게 만드는 과정이었을 뿐임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지금 힘들지 않다는 건
성장이 멈추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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