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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드형 Sep 23. 2022

모든 걸 쏟아내는 즐거움

대장내시경 하는 날

오늘 점심은 죽이다


대장내시경 검사 전날은

반찬 없이 흰 죽이나 미음을 먹으라는 가이드 때문이다.


3일 전부터는

씨 있는 과일, 깨, 잡곡류 등은 피해라 하길래

그동안 탄수화물 다이어트한다고 못 먹은 흰쌀밥과

국수나 빵 등 밀가루 음식을 맘껏 먹을 수 있어 좋았는데


막상 오늘 아침에 이어 점심까지

멀건 죽 한 그릇을 간장만으로 연신 먹으려니  

마치 중병 걸린 환자처럼 기운도 빠지고 기분도 별로다.


하긴, 내일 모든 걸 쏟아낼 텐데

지금 아무리 좋은 걸 먹어봐야 무슨 소용일까...




알람이 울렸다


장세척 약을 먹어야 할 시간이다.


모든 걸 쏟아내던

젊은 시절 기억이 난다.


술을 맛이 아니라 양으로 즐기던 시절.


싱싱한 간을 믿고 벌인 한때 객기였는지

마음속 꽉 찬 답답한 응어리가 있었는지


토할 땐 고통스러웠지만

속을 다 비우고 난 후에 느끼는 개운함이 더 컸다.


그래서였을까...


시간이 영원할 것처럼

건강이 영원할 것처럼

마시고 토하고

또 마시고 토했다.


어느덧,


오래 사는 것보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다 죽는 게

가장 행복한 삶이란 걸 아는 나이가 되고 보니


이제는 건강검진을 위해

모든 걸 쏟아내야 하는 장세척 과정조차

젊은 날의 폭음처럼 즐거운 이벤트로 느껴진다.



 

그나저나

술잔(?)이 작아져서 다행이다.


예전엔

30여 년 전 주말 '대학로 차 없는 거리'에서 마시던

커다란 막걸리통 하나 크기였는데


이젠

한 손으로 잡히는 하이볼 잔 크기로

4번 먹으면 된단다.


슬슬 한잔 마셔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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