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드형, 다시 태어나다
부자유친 유럽여행 9일 차
생일 축하해
비 오는 아침, 혼자 산책을 나섰다.
숙소에서 좀 떨어진 주택가까지 걸었더니
등교하고 출근하는 런던의 풍경들이 재미있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비가 오는데 우산 쓴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거다.
너무 흔한 일상이라서 그런가...
문을 연 가게가 거의 없어
워털루역 맥도널드에서 모닝롤을 사서 돌아왔는데,
일어나 있던 아들이 어디 갔다 왔냐며
'오다 주웠다'는 시크한 표정으로 생일 선물을 내민다.
우비였다.
한국 시간으로 아직 하루 남았는데 미리 준다고...
어제 유학 온 친구들 만나러 간 길에 사 온 모양이다.
전혀 기대하지 않던 깜짝 선물에 기분이 좋다.
오늘은 아들이 가장 기대하는 테이트 모던에 갔다.
옛 화력발전소였다는 엄청 큰 건물에
파리에선 보지 못하던 현대적 작품들이 많았는데,
미디어아트그룹 '장영해 중공업'
설치미술가 '양해규', '이불' 등
한국인 작가 3팀의 작품이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뿌듯했다.
근처 보로우 마켓에 들러
영국인들의 국민음식 '피시 앤 칩스'를 사들고
탁 트인 탬즈강을 바라보고 점심을 먹는데
내 기억이 맞다며,
<러브 액츄얼리>에서 리암 니슨이
엄마를 잃은 슬픔보다 사랑에 빠진 아픔이 크다는
맹랑한 양아들과 앉았던 벤치가 있는 그 장소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자마자
어제에 이어, 현지 지인과 또 약속이 있다며
옷을 갈아입던 아들 녀석이
숙소에만 그냥 있지 말고 뮤지컬이라도 꼭 보라며
무심히 나가 버린다.
일단 낮잠이나 자야겠다.
얼마나 잤을까...
깨어 보니 저녁 6시가 넘었다.
7시 반에 시작하는 뮤지컬 '맘마미아'를
온라인에서 당일 할인가로 서둘러 예매한 뒤
구글 지도를 보고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는 극장까지
빠른 걸음으로 워털루 다리를 건넜다.
티켓팅을 하고 자리에 앉으니
생각보다 좁은 무대였지만 관객석은 꽉 차 있었다.
혼자라는 외로움을 살짝 느껴질 무렵 막이 올랐는데...
2시간 훌쩍 넘게... 너무너무 행복했다.
가끔 영어 대사가 안 들렸지만
영화로 이미 봤기에 내용은 충분히 이해가 됐고,
무대를 꽉 채우는 배우들의 익숙한 '아바'의 노래에
관객들은 하나가 되어 호응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압도적인 현장감이었다.
마지막 앙코르곡인 <워털루>가 나올 때
나도 더 이상 못 참고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이 순간을 철저히 즐겼다.
워털루 다리를 다시 건너며 본
런던의 밤은 천국 같다.
쉰셋의 생일날을 이렇게 맞다니...
본드형, 당신
그동안 잘살아서 다시 태어난 거야.
저 멀리 떠있는 달이
그렇게 얘기해 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