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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드형 May 08. 2021

옛사랑처럼, 보고서란 게 지겨울 때가 있다   

내 맘에 열정이 고통으로 변한 이유

너 이젠 지겹다...


간만에 야근을 했다.

지난주에 끝내야 할 보고서가 마무리되지 않아 상사에게 한소리 들었기 때문이다. 모레까지 완료해 보고하는 걸로 일정은 조정했는데 내일이 마침 휴일이라 시간이 없었다.


남들은 다 퇴근한 사무실에 남아 뻑뻑한 눈 비비며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스트레스가 팍~~ 올라오며 오래  끊고 있던 담배 유혹마저 살짝 당긴다. 탕비실로 얼른 가서 달착지근한 커피믹스 두 개를 찐하게 타 보약처럼 들이켠다.

'보고서 정말 쓰기 싫다. 이젠 지겹다...'



옛날엔 열정이 있었다


컨설턴트였던 시절, 

보고서 작성에 밤을 새우던 적이 많았다. 그땐 힘든 줄도,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물론 삼십 대 한창 젊기도 했지만, 문서 한 장 작성에 열정이 있었고 일하는 게 참 좋았다.

아마도 몇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가치가 있었다.

고비용 컨설팅의 최종 산출물은 결국 보고서 한 권이다. 우스갯소리로 클라이언트가 프로젝트에 3억을 썼다면 보고서 가격인 셈이고,  100장이면 페이지 당 3백만 원 짜리니 문서 한 장을 어찌 소홀히 겠는가.


의미도 있었다.

당시 클라이언트는 컨설턴트를 '선생님'이라 불렀다. 마치 입시를 앞둔 수험생이 일타 강사를 대하듯 선진 경영기법을 배우려는 그들은 우리를 존중해 대했다. 컨설팅 보고서란 게 회사문제점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내용이란 점에서 병을 고치거나 예방하는 의사 선생님의 '처방전'과 다를 바 없었.


게다가 재미까지 있었다.

세로형 양식의 'Word' 보고서 작성익숙했던 내게 'PPT'한마디로 신세계였다. 일단 TV나 영화처럼 가로형 양식에다, 글뿐만 아니라 그림과 그래프를 원하는 위치에 이리저리 옮겨 배치할 수 있었다. 게다가 프레젠테이션 스크린에 띄워 애니메이션 효과까지 내는 그 마법의 도구를 사용보고서를 작성하다 보면 예술가가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가는 짜릿함을 종종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컨설팅사 이직 후  2년도 안돼 나는 'Consultant of the year(올해의 컨설턴트)'상을 받을 정도로 회사나 고객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땐 보고서를 사랑했다.


지금은 그냥 일이다


마케터로 전직한 지금,

보고서는 그냥 '해야 하는' 일이 돼버렸다. 컨설턴트 때와는 반대의 이유에서다.


때보다 훨씬 낮은 임금에 엄청난 양의 보고서를 매일 쓴다. 대부분 비슷한 포맷과 내용을 대상과 목적과 시기에 따라 약간씩 수정과 보완만거쳐 생산해내는 아류작들이. 보고서 한 장 가격이 3백 원은 되려나...


또한 근거 없는 자신감 넘치는, 너무나 바쁜 상사가 독자다. 그들은 아날로그 시대에 열심히 공부 성공한 경험이 강해 디지털 마케팅조차 본인이 익숙한 사고의 틀로 이해하려고 한다. 따라서 보고서의 형식표현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면서 누더기로 만들기 일쑤다. 마치 자세부터가 안된 부잣집 학생을 가르치는 과외선생이 된 기분이.


가치도, 의미도 줄어든 보고서 쓰기는 고통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직장인이라면 피할 수 없이 매일 부딪혀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차피 해야 한다면 '하고 싶은' 매력포인트를 찾아보면 어떨까?



보고서는 마케팅이다


상사는 고객이다.

마케터로서  기획안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예산 집행의 의사결정권쥐고 있는 상사에게 내 물건, 즉 보고서를 팔아야 한다. 이렇게 을 바꾸면 보고서 한 장 값은 그 원가인 내 연봉이 아닌 그 효용인 마케팅 기대효과를 기준으로 책정되는 게 보다 합리적이다. 그리고 고객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쉽고 매력적으로 느끼도록 보고서 표현을 맞추는 것도 당연하다.


보고서는 커뮤니케이션이다.

, 말로 할 보고를 글로 하는 것뿐이다. 멀티 태스킹으로 바쁜 상사와의 소통은 효율성을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보고할 콘텐츠에 따라 매체가 달라져야 한다. 긴급한 건은 문자로 짧게, 약간의 부연 설명이 필요하면 메일로 간단히 하면 된다. 정형화된 목차로 데이터나 표가 많은 계획 또는 실적 보고는 Word나 Excel이 편하지만 마케팅 같이 집중할 그래프나 창의적 이미지가 많다면 PPT가 더 효과적이다.


'나'라는 브랜드가 필요하다.

'혼이나 정신'까진 아니어도 관점과 의견이 담겨야 한다. 팩트나 데이터 등 객관적 정보만 있는 보고서 작성은 앞으로 AI가 대체할 업무다. 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그것을 종합적으로 해석한 시사점 도출실행방안 제시야말로 호모 사피엔스의 후손사람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다. 물론 보고 받는 상사는 견해가 다를 수 있지만, 내 나름의 논리적 맥락만 딴딴하다면 그걸로 좋은 이미지를 줄 수 있다.


이렇게 보니, 보고서는 마케팅을 참 많이 닮았다.


보고서 쓰는 것이

예전처럼 열정적인 사랑까진 아니라도,

고통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아닌


고객인 상사에게

고민의 흔적과 애정이 온도가 남아있는 상품을

제값을 받고 팔기 위한 치열한 광고 활동이라고 생각하니


이쁘진 않아도, 다시 좀 봐줄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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