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면 티 안 나고, 안 하면 티 나는
연애할 땐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 준다" 꼬시던
왕자 같은 남자더니
결혼하고는
"젖은 손이 애처롭다" 노래하며 살며시 손만 잡는
웬수 같은 남편이라 했던가.
나도 그랬다.
바깥일하는 가장이라는 핑계로
집안일과 육아를 아내에게 맡기고 모른 척했었다.
(30~40대 우린 맞벌이를 했었다)
정년이 꽤 남은 이른 퇴직을 하고
늦게나마 철이 들어
가사를 분담하고 살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는 아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
설거지를 도맡는 것이었다.
내가 회사 다닐 때
아내는 세상 귀찮다며
설거지를 하루나 이틀 몰아서 하곤 했었다.
평일엔 보통 저녁 한 끼 정도만 집에서 차려 먹고
노는 날이면 이래저래 외식을 자주 하다 보니
설거짓거리도 그리 많지 않았었다.
어쩌다 아내가 몸이 아프거나 힘들어할 때,
주말에 애처가 코스프레를 하고 싶어질 때
나도 가끔 설거지를 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고무장갑이 작다는 둥
집에 그릇들이 다 나와있다는 둥
온갖 생색은 다 냈었다.
아끼는 유리잔을 깨도 오히려 당당했었다.
퇴직 후 상황이 달라졌다.
출근 안 하고 생활비도 아끼려다 보니
삼시 세끼를 꼬박 집에서 해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주부인 아내 입장에선
매번 뭘 해 먹일까 하는 고민과 함께
싫은 설거지를 하루 세 번 해야 하는 불만도 늘었다.
작년에 산 식기세척기가 있었지만
애벌세척 후 전용세제를 따로 써야 하고
전기세나 물 많이 쓰는 걸 생각하면 낭비라며
손님들 와서 큰 상 차릴 때만 쓰는 보물이 되어 있었다.
설거지는 이제부터
내가 다 할게
그 말 한마디에
아내 얼굴은 다시 밝아지는 걸 느꼈지만
어쩌다 하는 이벤트에서 매일 하는 루틴으로 바뀐 설거지는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처음 몇 번이야
각종 음식 찌꺼기로 더러운 그릇들이
내 손을 거치며 깨끗해지는 걸 보는 맛이라도 있었는데
똑같은 일을 계속 반복하다 보니
슬슬 귀찮은 노동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기름기가 남은 프라이팬을 닦을 때
냄비에 묻어 굳어버린 소스나 양념이 안 떨어질 때
손이 안 닿는 주전자 안 쪽을 닦을 때처럼
설거지의 난이도가 높아질수록
괜히 혼자 다 한다고 큰소리쳤나 하는 후회까지 들었다.
다행히, 부엌개 3개월이 지난 지금은
기름기는 휴지로 닦아 내고
굳은 소스나 양념은 뜨거운 물에 불리고
주전자 안에 수세미를 넣어 긴 수저로 휘젓으면 된다는
나름의 요령이 생겼다.
유튜브를 참고해 설거지 프로세스를 정하고 나니
속도도 조금씩 빨라졌다.
건조된 식기들을 먼저 제자리에 치운다.
건조대를 들어내 싱크볼 공간을 최대한 확보한다.
설거짓거리를 크기와 난이도에 따라 분류한다.
세제를 풀고 크고 쉬운 것부터 수세미로 세척한다.
기름기, 소스, 양념 묻은 건 다른 수세미를 사용한다.
물을 틀어 같은 순서로 헹구고 건조대에 쌓는다.
거름망에 쌓인 음식물 찌꺼기를 제거한다.
설거지하다 보면 가끔
자문자답 식으로 혼자 깨닫는 '알쓸신잡'도 있다.
Q : 회사나 학교 구내식당에선 왜 식판을 쓸까?
A : 설거지 시간이 줄어 인건비를 아낄 수 있다.
Q : 스님은 발우공양 때 설거지를 어떻게 하지?
A : 기름기 없는 음식이니 청수로 씻고 마신다.
한 때 '설거지남'이란 말이 유행했었다.
연애 경험은 없고 직장이 탄탄한 남자가
늦게 결혼해
여자에게 호구 잡혀 사는 모습을 조롱하는 의미로
'퐁퐁남'이라고도 불렸었다.
나는 다르게 정의하고 싶다.
살림 경험은 없고 직장은 퇴직한 남편이
늦게 철들어
아내에게 사랑받고 사는 모습을 칭찬하는 의미로
'본드형'이라고도 불린다고.
젖은 손이 애처로워 살며시 잡아본 순간
거칠어진 손마디가 너무나도 안타까웠소...
매력적인 저음으로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불렀던
가수 하수영은 34살에 요절한 총각이었다.
식기세척기에 설거지남까지 등장한 지금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가사지만
마왕이라 불렸던 故人 신해철도
이 노래를 불렀던
한 애처가였음을 잊지 말자.
https://youtu.be/Bdz-wsHrk5w?si=tOqRZOp6gm5GrvB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