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

기술에 밀린 슬픈 인간의 행위

by 본드형

어머니 집엔 오래된 것들이 많다.


80년대 로고가 선명한 세탁기가 대표적인데

아직도 잘 돌아가는지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세탁기를 들이기 전까지

추운 겨울이라도 찬물에 직접 손빨래를 해야 했던

젊은 어머니의 고생이 느껴지기도 하고


하늘이 파란 날 옥상에 걸린

새하얀 이불들을 보며 행복해하던

내 어린 시절이 떠오르기도 하는 물건이다.




요즘 세탁기는 정말 훌륭하다.


빨랫감을 모아 집어넣고, 세제를 풀고,

시작버튼 하나만 누르면 끝이다.

모든 걸 다 알아서 해 준다.


게다가 건조기까지 붙어 있어서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와도

세탁 후 바로 뽀송뽀송 말릴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똑똑하고 편리한 세탁기라도

두 가지는 꼭 주의해야 한다.


1. 흰 빨래는 색깔 있는 빨래와 분리해 돌릴 것

2. 줄어드는 소재 옷은 건조기에 돌리지 말 것


더러운 걸 깨끗이 하는 집안일로

빨래(의)는 설거지(식), 청소(주)와 함께

3대 일상 중 하나다.


세탁기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는

살림하는 주부로서 가장 힘들고 오랜 노동이

분명 빨래였을 텐데


그 시절을 상상하면

애 업은 동네 아낙네들이 개울가나 우물가에 모여

수다를 떨며 빨래하는 모습이 자꾸 연상된다.


못된 시어머니와 게으른 남편 대신

애꿎은 빨래들만 방망이로 실컷 두들겨 패며

고된 살림의 하루하루를 버티던 슬픔이 느껴진달까.


어쩌면 그들에게

빨래는 자유의 행위였고

빨래터는 해방의 공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손 대신 버튼 하나로

모든 과정이 끝나 버리는 세탁이란 기술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가수 이적은

기술에 밀린 '빨래'란 인간의 행위를

사랑으로 승화시켜 참 슬프게도 노래했다.


묵은 사랑의 흔적을 다 지워버리고 싶었다.


오후에 비가 온다고 해도 시작했던 빨래를

손목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계속한다.


이마에서 흐르다 눈에 들어간 땀을

연신 어깨로 닦아내며.

눈물이 아니라고 스스로 되뇌며.


<이적의 단어들> 中


https://youtu.be/viDOMBeM740?si=5H1QyIvZnvrO2v0V

비 올듯 흐린 날 들으면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