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수시장을 아시나요
비도 오는데
장이나 보러 갈까?
'술 한잔 생각나'는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아내는 웃으며 장바구니를 들고 와 팔짱을 낀다. 집을 나서 5분쯤 걸어가면 약수시장 골목이 나오는데 최근 넷플릭스 <미친 맛집>에 소개되면서 서울의 핫플레이스가 된 곳이다.
<태양>이란 이름처럼 우리 동네에서 가장 크고 밝은 마트에 들어가 막걸리 하나에 안주 삼을 군만두와 오이, 그리고 후식용 바나나를 고르면 장보기 끝.
바쁜 맞벌이 부부로 신도시에 살 땐 주말마다 차 끌고 멀리 있는 대형 할인마트로 가서 카트에 한가득 낑낑대며 장 보는 게 일이었지만, 은퇴한 부부가 되어 서울 남산자락에 사는 지금은 동네 산책 겸 매일 하는 장보기가 일상의 소중한 재미를 준다.
재래시장이나 대형마트가 없던 옛날, 아버지가 나귀 타고 장에 가시면 고추 먹고 맴맴 하던 그 시절에 장보기란 주부가 전담하는 '집안일'이라기보다는 가장이 담당하는 '바깥일'로 여겨졌다고 한다.
어쩌다 서는 장터란 곳이 장돌뱅이 같은 외지인들이 많이 모이다 보니 여자들이 안심하고 다니기 어려웠기 때문이라는데, 그래서인지 남자들에겐 장 보는 날이 필요한 것 사러 나간 김에 술 한잔 걸치고 돌아오는 즐거운 나들이었단다.
세상은 바뀌었다. 지금은 온라인으로 주문만 하면 다음날 새벽에 문 앞으로 직배송되는 시대다. 장보기는 이제 주부의 고유권한이 되었고 남편들은 아내가 사는 대로 쓰고 주는 대로 먹는다.
직장에 다니던 얼마 전까지 나 역시 장보기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무슨 물건을 얼마나 자주 많이 사는지, 어딜 가야 좋고 싼 게 있는지 알지 못했다. 어쩌다 노는 날에 아내를 따라나서도 머슴처럼 힘만 쓰고 카드로 결제만 하면 될 일이었다.
요즘은 동네 산책 겸 매일 들르는 약수시장에서 아내의 장보기를 관찰 중이다. 젊었을 땐 오래 보관이 가능하고 조리도 편한 냉동, 냉장 식품을 많이 구매했다면 오십이 넘은 지금은 한 끼를 먹어도 건강을 생각해서 제철에 나온 신선식품을 주로 고른다. 계란이나 요거트처럼 아침마다 먹는 건 냉장고 속 재고가 떨어지기 2~3일 전 채워 놓아야 하고, 양념류나 채소류들은 종합마트에서 사지만 생선이나 과일은 근처 전문가게가 더 싸고 싱싱하다는 걸 이젠 안다. 소량으로 자주 장을 보니 보통 에코백 하나 들고 가면 충분하지만, 부피 큰 물건이 많거나 세일행사로 탕진잼에 빠졌을 땐 3만 원 이상 구매해 따로 배달시키면 된다는 것도 배웠다.
하지만 장보기의 진짜 재미는 따로 있다. 약수시장 내 맛집들이다. 이미 소문난 순댓국집과 호두과자집은 늘 대기줄이 길어 지나쳐 버리지만 새로 생긴 베이커리의 시그니처인 무화과 빵을 사 오는 길에 에스프레소 바에 들러 피에노 한잔 걸치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
과일집 옆 화장품 가게엔 산적 포스의 아저씨가 부업으로 숯불김을 직접 구워 파는데 고소한 참기름에 짭짤한 맛이 어릴 적 먹던 딱 그 맛이다. 생선가게 앞 호떡집에는 <응답하라 1988>에 나올 것 같은 파마머리의 동네 아줌마들이 늘 서너 명씩 모여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장사할 생각은 안 하고 큰소리로 깔깔대며 수다를 떨고 있다.
창 밖에 보슬비 내리는 소릴 들으며, 지글지글 구워진 만두와 오이 무침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잔 들이켜다 보니 지리산 섬진강변 화개장터가 생각난다.
조영남의 노래처럼 '있어야 할 건 다 있지만 없을 건 없는' 그냥 시골 장터지만 영호남 사람들이 어우러져 미운 정 고운 정 주고받는 옛 시장의 풍경이 남아 있는 그곳처럼
대형 할인마트보다 물건이 더 다양하지도, 가격이 더 싸지도, 그렇다고 품질이 더 좋지도 않을 수 있는 그냥 동네 골목상권이지만 이곳 약수시장엔 나이 들수록 점점 더 그리워지는 이웃 간의 정과 사람 냄새가 아직 남아 있다.
구경 한번 와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