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이 반이다
큰일 났다
며칠 전부터 생일상 차려준다고 큰소리쳤는데
아내 생일날 아침 늦잠을 자버렸다.
부엌으로 달려가 앞치마 두르고
유튜브에 나온 대로 미역부터 불리려는데,
미역국은 최소 1시간은 푹 끓여줘야 제 맛이란다.
어떡하지... 잠깐 고민하다
간밤에 마신 술 해장도 할 겸 얼큰한 황태국으로
급히 메뉴를 변경하고, 스마트폰에 적어둔
초간단 레시피를 찾아냈다.
① 황태를 잘게 찢어 계란물을 입힌다.
② 대파와 소고기 그리고 다진 마늘과 함께 끓는 물에 넣는다.
③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취향에 따라 고춧가루나 후춧가루를 추가한다. 끝.
20분 만에 후다닥 완성한 국물을 한 수저 떠서
아내의 입안에 넣어주고 표정을 살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 척을 했다.
"맛있는데"
"당연하지, 남편의 정성이 들어갔는데"
요리 잘하는 남자가 사랑받는 시대다.
성시경, 류수영, 정재형 같은 '요섹남'들을 보면
왠지 봉골레 스파게티 정도는 바로 만들 줄 알아야
멋진 남편으로 대접받는 세상인 것 같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난 할 줄 아는 요리가 거의 없다.
스파게티는 고사하고,
유학시절 한식이 그리워 셀프 개발한 된장찌개와
어머니로부터 속성으로 배운 황태국이 전부다.
그렇다고 라면 하나를 기막히게 잘 끓이는
나 만의 비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은퇴 후 살림을 조금씩 배우면서도
요리 재능은 없으니 설거지나 잘하자는 마음이었는데
어느 날 아내가 자기 최애 보양식이라며
전복죽 끓이는 법을 알려준 적이 있다.
그 덕분에 할 줄 아는 메뉴 하나가 추가되었다.
쌀 한 컵 불리고 (30분)
전복 씻고 (거품날 때까지 칫솔질)
쌀 먼저 참기름에 볶고
전복 삶고 (뿔난 쪽 이빨 제거/내장은 살리고)
물 붓고 전복 썰어 넣고
소금으로 간하며 끓인다 (압력밥솥이면 좋다)
따라 해 보니 레시피처럼 간단한 게 아니었다.
전복을 칫솔로 깨끗이 씻는 거라든가
숨은 이빨을 찾아 제거하는 게 은근 손이 많이 갔다.
하지만, 다 끓이고 나서 한 입 먹었을 때
사 먹는 죽이 따라올 수 없는 그 건강한 맛이란...
왜 요리는 정성이 반이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요즘은 아들의 아침상도 가끔씩 챙겨준다.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신선한 레몬을 갈아 물 한잔 주고
계란 요리와 요거트 하나 정도를 주는 게 고작이다.
대신, 조리법과 추가재료는 매번 다르게 한다.
계란은 수란, 프라이, 스크램블, 삶기를 번갈아 하고
요거트에는 블루베리, 키위, 복숭아, 자두 같은
제철과일을 돌려가며 넣는 식이다.
귀찮을 때도 있지만,
잘 먹었다고 말해주는 아들 목소리가 듣기 좋다.
사실, 최근 요리에 대한 관심은
드라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영향일지도 모른다.
번역 작가인 남편(한석규)은
대장암에 걸려 음식을 제대로 못 먹는 아내를 위해
요리를 배우기 시작한다.
그녀가 먹고 싶어 하는 요리를, 먹을 수 있는 재료로
하나씩 만들어 가는 과정을
사진과 함께 글을 써서 매일 블로그에 올린다.
무염잡채나 돔베국수처럼
쉽지 않은 메뉴라도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정성껏 만들어 내는 남편.
맛과 건강 둘 다 생각하는 그의 정성으로
아내(김서형)는 시한부 암투병을 일 년 넘게 견딘다.
대패삼겹살이 먹고 싶다는 엄마를 위해
대학생 아들도 나선다.
병원으로 캠핑도구를 챙겨 와
야외주차장에서 고기를 구워 먹으며
평생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의 기억을 남긴다.
결혼하고 처음 차린 초라한 생일상에도
엄지 척하는 아내와,
계란과 요거트 뿐인 아침을 군소리 없이 잘 먹어주는
다정한 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요리 잘하고 싶은 남자로서
약속 하나 할까 한다.
다음엔 봉골레 파스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