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을 벗어나는 것
그는 여름을 보내며 건넬 말이라곤 계절 인사뿐이라며 스스로에게 이야기하였지만. 이내 그런 인사는 시답잖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건넬 수 있는 그런 인사말이야 귀에 남을 말 없는 허상이거늘. 입에라고 온전히 남아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러다가도 혼자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가 건넬 인사라고는 고작 '잘 지내'라던가. '날 기억해?'따위의 말이었으므로. 계절 인사보다도 듣기 싫은 말이었다. 그는 이내 속으로 떠올렸다. '이리 전할 말도 없는데, 들을 의사 없는 그녀를 떠올려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을 갈무리했다. 그는 전하고 싶은 말들이야 많았지만 끝 내 입 밖으로는 내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여름, 그는 여름을 선명히 기억한다. 하기야 그가 기억하는 것은 더운 여름의 짜증 따위가 아닌 그녀의 온기였다. 사람들은 겨울에 사람의 온기가 그립다는데. 그만은 여름의 그녀의 온기를 떠올렸다. 무더운 여름 그 사이를 보내며 단 한 걸음도 멀어지지 않았던 그녀를 다시금 떠올려 보는 것이다. 그는 더운 걸 싫어했으나 그녀는 따스함을 좋아하여. 더움 속에서도 그의 따스함을 찾았다. 그는 가끔 더위에 지쳐 화가 나기도 했으나. 같이 더위에 헉헉 거리다가도 그녀의 미소를 보면 풀었던 팔짱을 다시금 끼곤 했다. 그러면 그녀는 그에게 더욱이 다가와 여름의 온기를 안겨주었던 것이다. 그는 팔에서 땀이 주륵 흐르는 순간에도 그 온기만은 다르게 느꼈다. 그에게 여름이란 무더운 더위가 아닌 무한한 온기였으므로 그 온기는 그에게만은 다르게 기억에 남았다. 그에게 더위는 온기로 잊히는 것이었다. 그에게 여름이란 그저 따스한 계절이었을 뿐이었다.
그가 여름을 홀로 보내는 순간이야말로 싸늘한 계절이었고. 그로 인해 그가 할 수 있는 계절 인사말로는 '여름이 추워. 너무나도 아려.' 따위였을까. 이번 여름은 왜 이리 차가웠는지 한탄을 하고 나면 주변 사람들은 그를 그저 미친 사람 취급을 했던 것이다. 여름이 지난 뒤에는 더욱이 추워지는 계절이 그의 손을 시리게도 만들었던 것이다. 따스히 감싸는 온도도, 온기도 그는 오로지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유독 추위를 느꼈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조금씩 두꺼워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는 너무나도 온몸이 시려 두꺼운 잠바라도 꺼내 입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더위를 잘 타는데 왜인지 이번 계절은 더위라곤 느낄 수가 없었기에. 그럼에도 그녀의 온기의 상실이 원인이라곤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에 이내 생각을 비워버린 것이다. 그는 그저 온몸을 떨며 길을 지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것이다.
그는 여름의 심장 소리를 기억한다. 쿵- 쿵- 하고 울리던 여름의 소리는. 온기만큼이나 따스한 것이었고. 마주 닿은 팔뚝 사이에서 느껴지던 그녀의 심장 박동소리야말로 여름의 소리였다. 따스함을 넘어 뜨거운 그 온도는 온몸에 진동하여 여름임을 상기시켜 주던 것이다. 이런 자극은 그에게 너무나도 자극적이라 그의 심장까지도 울렸다.
어느새 초록빛이 걷히고 붉게 물들어가는 나무를 바라본다. 그는 조용히 나무에 손을 올려본다. 거칠하고 서늘한 감촉이 그의 심장까지 단박에 올라타 그를 서늘하게 만든다. 그는 나무의 소리에 조금 동요하며 이내 손을 떼어버린다. 그저 서늘한 감촉만이 여름이 지남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여름이 지남을 깨닫는다. 여름의 심장도, 여름의 온기도 이제 그의 것이 아님을 안다. 그는 여름의 심장의 꺼짐을 본능적으로 떠올리고 있었다. '그래 그날은 꼭 저런 나무와도 같았지.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의 온기가 아닌 말라비틀어진 무엇과도 같았지.' 그저 차갑고, 서늘하고, 고요한 그날을 떠올리며 그는 다시 길을 걸었다. 계절을 벗어나는 것은 그리 쉬운데, 생각은 왜 그리 벗어나기가 힘든지. 그는 다시금 그때를 떠올린다.
"날 사랑해?"
"... 사랑해."
"사랑하는데 나는 왜 이래?"
"나는..."
"사랑이란 말이 원래 그리 차가워?"
그를 다그치고, 또 다그쳐도 그의 사랑은 뜨겁지 않았다. 건조하고, 서늘한 느낌만이 그를 감쌌다.
"안아줘. 그냥 빨리 안아줘. 제발."
빌고 빌어 뜨거운 눈물로 붙잡아도 뜨겁지 못했다. 안아달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품에 안았으나 안은 사랑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서늘함에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을 느꼈음에도 그를 놓을 수가 없었다.
"왜 이리 고요해. 사랑이... 왜 이리 고요해."
여름이었는데도. 전혀 열이 나지 않아서. 여름의 심장이 들리지 않아서. 그는 주저하다가 그만 여름을 놓아버렸다. 이리 차가운 계절은 여름이 아니기에. 그가 생각한 사랑은 이런 여름이 아니기에. 붙잡고 매달려도 계절은 돌아오지 않기에.
"왜, 사랑이란 말로..."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얼굴에 열감을 올린다. 말은 뜨겁다 못해 붉은 용암마냥 흘러내리는 데도 그는 여름을 맞이하지 못한다. 그 역시 완연한 여름을 맞이하지 못한다. 이번 계절이 이리도 추웠나. 이리 한기가 돋아 소름이 끼쳤나.
여름의 온기는 어디로 갔는가. 그는 추운 여름을 보낸다. 거리를 걷는다. 그날의 사랑은 나무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다시는 여름을 온전히 맞이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여름의 심장이 멈춰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음을 알았다. 그는 더위가 싫었는데. 이제는 다시 한번 더운 여름을 맞이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이내 여름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겁이 많았다. 여름은 그를 끝내 안아주지 않았고. 온기를 나눠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