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애인 이상의 무언가

by 유월

"난, 네 아빠가 아니야."

오래 사귄 애인이 나에게 했던 말이었다. 충동적으로 던진 말이었을 테니 그것이 본심이었겠지. 그 사실을 곱씹으며 나는 아파했다. 저런 말을 애인에게 내뱉게 한 것은 분명히 나의 탓일 텐데.

아빠가 돌아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누구보다 아빠의 부재를 느꼈다. 이전 서술한 것처럼 아빠에 대한 애정이 강했지만, 아빠는 내 사랑이 타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적이 없었다. 늘 내 사랑에 의문을 남기고, 사랑하는 날 바보로 만들기 바쁘셨다. 아빠랑 잘 지내냔 질문에 거짓으로도 그렇다 말할 수 없는 내가 되었으니까.

그러한 부재는 다른 집착을 만들어내곤 했다.

어릴 땐 학교 선생님을 좋아했다. 날 챙겨주던 유일한 남자 어른이었다. 아빠는 어느 순간 내게 밥을 먹었느냐고 물어봐주지 않으셨지만. 그 선생님만은 매일 내게 밥을 먹었느냐고 물어봐주셨다. 당시는 왕따를 당해 점심을 툭하면 거르기 일쑤였는데. 그런 나를 위해 매일 안부를 물어보시고, 밥을 사주기도 하셨다. 가끔 시간 내어 내 이야기를 들어주셨고. 잘 이겨내야 한다며 조언을 해주셨다.
선생님을 좋아하게 되는 건 당연했다. 사랑을 느껴본 적 없는 내게 그것은 분명 사랑이었다. 나를 위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렇게 가슴이 벅차오르는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해주는 일이었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그러한 마음을 오래 유지했다. 남자친구에 대한 관심도 생기지 않았었다. 나는 날 지지해 줄 한 명만 있으면 되니까. 선생님에게 애인이 생기시곤 조금 줄어들긴 하였지만 쉬이 사라지는 감정은 아니었다.
그러다 내가 맘에 든다는 사람이 생기고, 적극적인 애정 공세 끝 남자친구가 된 이후엔 결국 작은 감정이 되었지만. 생각해 보면 그제야 선생님을 온전히 '어른'으로 볼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지금은 그 선생님도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셨고, 나 역시 가끔 왕래하며 그 소식을 듣는 것에 그쳤지만. 당시는 진심으로 사랑을 했었다. 그것이 가장 온전한 사랑이었다.

첫 연애는 엉망으로 망치고, 두 번째 연애는 꽤나 장기연애를 하게 되었다. 남자친구는 다정한 성품이었고, 이것저것 잘 챙겨주는 사람이었다. 야자를 할 때면 기다려주었고, 사물함에 간식을 챙겨주었다. 연애를 많이 해보지 않은 나도 그가 퍽이나 다정하구나 떠올렸지만. 사랑의 부재는 쉬이 채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그와는 자주 다퉜다. 대부분은 내가 문제였다. 사실, 그의 그 말을 듣기 전까진 내 문제를 인지하지도 못했다.

"난 가끔 네가 날 아빠로 생각하는 것 같아서 답답해. 난 네 아빠가 아니야. 남자친구지."

그 말을 듣곤 답할 말이 없어 눈물 글썽이고 자리를 나왔을 뿐이고. 집에 돌아갔을 땐 무능력한 아빠가 잠들어 계셨을 뿐이었다. 그때의 비참함, 서러움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남자친구를 남친 이상으로 대하는 사람. 사람 피를 말리는 사람. 나의 부족함을 타인에게 채우려고 하는 못난 사람이었다. 집엔 그 부재의 대상이 어떤 말도 없이 그저 머물렀기에 상처가 더 컸다.

사랑을 받아본 적 없으니, 주는 것도 벅차게 힘이 들었다. 연애를 잘 해낼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그의 말에 틀린 말이 없었다. 나는 그를 연인 이상으로 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 사랑한다면 그 정도는 해줘야지 하는 오만한 생각이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면 허용이 되지 않았다. 너는 날 맹목적으로 사랑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하는 우스운 생각 따위. 그때는 그것이 사랑인 줄 알았고. 남자 친구 이상의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그가 미웠다.

헤어진 이후엔 무너지고. 또 새로운 '아빠' 자리를 대체해 줄 사람을 찾아 떠났다. 남자친구는 없어도 문제가 없을 텐데. 아빠의 부재는 내게 치명적인 일인 것만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자 친구가 필요했던 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상형을 물어보면 나는 '헌신적인 사람.', '너무 고마워 미안해지는 사람.'을 대답하곤 했다. 외적인 조건 없이 그저 내 부탁이라면 다 들어주는 그런 이를 택했다. 내가 먼저 누군갈 좋아해 본 적도 없었다. 동갑이래도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골랐고. 나이가 차이 많이 나더라도 연상을 선호했다. 누군가는 내게 '네가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라는 이야기를 쉽게 내뱉곤 한다. 그러나 내 생각엔 이 이야기는 단순히 '사랑'이 아니었다. '결핍', 지나치고 지긋지긋한 결핍. 사랑의 부재, 정서적 지지 결여. 어쩌면 그 이상의 것이었다.

내게 남자친구란 무엇일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혼자가 된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아빠인지. 그저 다정한 남자친구인지. 아님 어릴 적부터 열망한 다정한 아빠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