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청세는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청소년, 세계와 소통하다’라는 이름의 청소년 인문 토론의 장입니다. 정세청세는 청소년이 스스로 생각하고 자유롭게 소통하면서 타인을 존중하는 민주 시민으로 성장하길 꿈꿉니다. 2019년 현재까지 36개 지역에서 2만 4천 명이 넘는 청소년들이 참여했으며, 올해 정세청세에서는 “삶이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도록”이라는 주제로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고 있습니다.
정세청세 브런치 다섯 번째 글은 전남 강진에 살고 있으면서, 광주에서 정세청세 행사를 열어가고 있는 청소년 기획팀원 김민하 님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전남 강진에 살고 있는 18살 김민하입니다. 겉보기엔 평범한 고등학생이지만, 가슴 속엔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저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제 일상은 무척 단순합니다. 여느 학생들처럼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학교에 가지요. 수업을 듣고, 숙제하고 하루를 보내고, 또다시 다음 날이 반복됩니다. 정말 무료합니다. 제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를 물으면 언제나 돌아오는 대답은 학생은 미래에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숨이 콱 막히는 느낌이 들어 답답해지곤 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어느 날 조금씩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제 안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 걸까. 왜 세상에서는 당연한 권리가 지켜지지 않는 것일까…’와 같은 질문이 생겨났고, 그리고 그런 질문을 다른 친구들과 소통하고 싶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우연이었지만 운명적으로 정세청세를 만났습니다.
사각사각 샤프가 종이를 지나는 소리만이 적막한 교실, 영어 단어 수행평가 시험 시간입니다. 아는 게 나왔다는 안도와 도무지 모르겠다는 탄식과 이미 포기해버린 하품이 한 교실 안에 공존합니다. 그리고 으레 시험이 끝나고 점수가 나오면 서로에 대한 품평회가 시작됩니다. “넌 지잡대 갈 수준밖에 안 되겠다”, “부럽다, 너는 SKY 가겠는데”, “내 이번 인생은 완전히 망했어.” 농담조로 주고받는 말들이지만, 고작 영어 단어 시험으로 인생을 평가하는 이런 대화를 듣고 있으면 씁쓸해집니다. 우리는 아주 어릴 적부터 획일적이고 표준화된 시험 속에 살고 있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 한다는 것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습니다. 공부가 아닌 다른 길을 가고 싶다고 말해도 어른들은 “공부를 잘해야 직업을 선택할 기회도 넓게 주어진다”는 말로 당장은 눈앞의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우리 반에는 수업 시간에 잠을 많이 자고, 축구만 좋아하고 공부에는 흥미가 없는 친구 A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A가 드론 하나는 정말 잘 날립니다. A가 날리는 드론을 보고 있으면 아름답다는 느낌도 듭니다. 영어 성적 때문에 A의 어깨가 처지는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표준적인 시험공부는 필요할 수 있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어야 하고, 진짜 공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짜 공부란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능력을 쌓아가는 것이고, 그런 공부를 상상하면,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 행복합니다. 넓은 세상을 탐구하고, 새로운 것들을 알아가는 건 아주 큰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가슴 설레는 진짜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불어넣어 준 것이 바로 정세청세입니다. 정세청세에서는 당장 눈앞에 성적 때문이 아니라, 미래에 돈 많이 버는 직업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공부하는 곳입니다. 그런 나의 행복은 세상의 정의와 맞닿아있습니다. 저는 종종 친구들에게 다양한 시사 이슈에 대해서 말을 건넵니다. 기후 위기와 환경 문제, 성별의 권력 관계에 대한 문제, 조현병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시선, 그밖에 정치적인 사안들 등등이요. 대부분의 제 친구들은 세상에서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제가 이야기를 해주면 그제야 충격을 받고 깜짝 놀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세청세 소통의 장에서 저는 지금 우리 시대에서 가장 절실하게 고민해야 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토론할 수 있었고, 이는 저의 일상 깊숙한 곳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알아가는 일은 저에겐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를 느끼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 참여한 정세청세에서는 인간이 버린 플라스틱 조각으로 고통받으며 죽어가고 있는 알바트로스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제가 사용하는 플라스틱 제품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칫솔과 치약, 의자, 일회용 물병, 학생들의 필수품인 각종 학용품 등등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이 플라스틱이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많은 플라스틱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에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문제라는 것을 이제껏 인식하지조차 못한 것이 정말 큰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정세청세를 하면서 만난 사람 중에서는 육식 문화가 우리 세상에 낳는 무수한 문제를 직시하고, 동물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채식주의를 실천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정세청세 모임이 끝나자마자 집에 와서 가족들에게 채식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막상 고기를 먹지 않으려니 먹을 수 있는 것을 찾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토록 좋아했던 라면과 떡볶이의 어묵도 먹지 못하고, 계란과 버터가 들어가 있으니 쿠키도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절망적이었습니다. 보는 것으로라도 만족하기 위해 처음으로 유튜브 먹방을 보기도 했습니다.
정세청세 활동을 하는 것은 기획팀원들과 함께 공부하고 소통하는 일이었고, 그것은 저에겐 언제나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제 일상생활과 정세청세가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것을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번 제2회 정세청세 “인간답게 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진행하면서였습니다.
이번 회를 준비하면서 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존한 작가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었습니다. 수용소 생활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말 그대로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과 마주했습니다. 그곳은 살아있는 것 자체가 절망이었습니다. 삶은 극도의 허기짐과 배고픔을 견디는 일이었고, 강도 높은 노동과 지옥과 같은 고통은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 정도였습니다.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 삶과 너무 달라서 잘 와 닿지 않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이토록 무참히 짓밟히는 경험은 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공부한 다른 사례에서 그런 제 생각이 뒤집어졌습니다. 바로 국가공무원 시험에 대한 내용이었는데요. 시험 시간 동안 부정행위의 위험성이 있어서 화장실을 가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험 도중에 용변이 급한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 시험장 안에서 검은색 우산으로 몸을 가리고 휴대 용기에 용변을 본다고 합니다. 적막한 시험장에서 용변을 처리하는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국가는 “부정행위도 방지하고, 용변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말하지만, 이 충격적인 장면을 보면서 마치 아우슈비츠에서 비인간적으로 모욕을 당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아우슈비츠는 강제적으로 그런 상황에 놓여야 했지만, 시험장은 자발적으로 모욕을 감수한다는 점에서 더 끔찍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최소한의 인권마저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저에게는 높은 성적을 받아 인기 있는 대학에 들어가야 하는 의무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인간의 권리는 어느 누구도, 어떤 이유로도 침범할 수 없습니다.
알렉산더 대왕과 철학자 디오게네스와의 일화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현자라고 알려진 디오게네스를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갑니다. 디오게네스는 거지 철학자로 불리며, 집은 몸이 들어갈 수 있는 통 하나인데, 그것이 그의 전 재산이기도 했습니다. 대왕은 모든 것을 들어줄 것처럼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묻습니다. 이에 디오게네스는 “대왕이시여 햇빛을 가리지 말고 옆으로 비켜주십시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디오게네스는 부도, 명예도, 권력도 아닌 그저 햇빛 그 자체만을 필요로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알렉산더 대왕조차 디오게네스의 그런 당당한 마음을 가질 수는 없었습니다. 디오게네스의 당당한 자존감, 그것이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요. 저는 바로 그러한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정세청세를 통해 배우고 싶고, 그것이 때론 내가 직면한 무수히 많은 문제에 괴로움을 느끼더라도 극복해나가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려움을 극복할 희망의 힘을 더 많은 청소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정세청세를 하면서 저의 학교생활이 달라졌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보이는 것들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습관도 생겼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지내온 친구들이 우스갯소리로 저에게 뭔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한 것 같다고 말해주는 일도 생겼습니다.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 합니다. 시험기간에도 종종 책을 보는 저를 보면서 친구들은 고개를 갸웃합니다. 물론 시험공부가 중요하지만, 동시에 지금 저에게 더 절실한 것은 제 인생에 대한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진짜 제 삶을 위한 공부라고 생각하면 학교 공부도 무척 재밌습니다.
저는 하고 싶은 것이 정말 많습니다. 글을 써서 문학 공모전에도 작품을 내고 싶고,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콘텐츠를 제작하고 싶습니다. 차별이 없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목소리도 내고 싶습니다. 해외여행을 떠나서 세계 여러 나라의 박물관을 가보고 싶기도 하고요. 언젠가는 작은 헌책방을 열어보고 싶기도 합니다.
여기까지가 저의 이야기입니다. 궁금합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요? 언젠가 만나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어디든 괜찮지만, 정세청세면 더욱더 좋겠습니다. 어떤 이야기라도 환영합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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