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벌 떠는 손을 발견해버렸다.
몇 년 전 국가 중앙행정기관의
입찰 건에 대한 pt를 한 적이 있다.
해당 pt는 운영에 대한 내용 그리고,
콘텐츠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이 된 PT였는데,
콘텐츠 기획자이자, PM이었던 내가 콘텐츠 부분 발표를 맡게 된 것이다.
사실 이 pt는 해당 사업부서의 본부장님 혼자 진행하셔도 되는 거였다.
그런데, 그는 늘 이렇게 나눠서 하기를 바라셨다.
왜 그럴까? 고민을 해봤는데,
좀 더 전문적으로 보이도록 하기 위한 전략인가? 정도로 결론 내었다.
(알고 보니 책임 분담을 위한 것이었다. ㅎ)
나는 당시 과장이었다.
보통 중요한 사업의 pt는 팀장급 이상이 하는 것인데,
내가 하게 된 이유는.. 바로
팀장의 발표 울렁증 때문이었다.
발표를 할 때면, 염소소리가 난다는 이유였다.
나는 속으로 분노하였다.
이게 과연 팀장이 할 말이란 말인가!
자존심도 없단 말인가!
하지만 이내 나에게 좋은 경험이자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였다.
아이러니하게, 제안을 수락하자
팀장님은 묘하게 기분 나빠하였다.
오~ 멋있는데~라고 비꼬기도 하였고,
못하겠음 말하라고 영업팀의 부장에게 부탁하겠노라 하였다.
콘텐츠 관련 pt인데, 영업보다는
직접 제작한 팀에서 하는 게 맞죠.
나는 내 생각을 말하였다. 그러자 그녀의 말.
그래 네가 여기서 야망이 있으면 해야지~
(나는 그때 이직 준비 중이었고, 이 PT건만 마무리되면 퇴사하겠다고 생각하던 중이라
광. 장. 히 어이없었다.)
어찌어찌, 내가 하기로 결정이 되었고,
진행되었다.
이제부터는 해당 사업부서의 본부장님과의 이야기이다.
본부장님은 발표 2주 전부터 거의 아침 1시간 정도를
나와 함께 발표를 연습하였다.
처음에는 국가 관련기관 pt가 처음인 나를 배려해 주시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가 연습하는 시간보다 본인이 연습하는 시간이 길었다.
어느 날은 갑자기 나에게 말씀하셨다.
" 자다가 일어나서 툭 쳐도 이 발표내용이 술술 나와야 해"
...
"아.. 네. 알겠습니다."
대답했다. 그리고 어느 날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긴장할 필요 전혀 없어. 어차피 우리가 계속하던 사업이잖아~"
"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또 어느 날은
"들풀 과장 그날 뭐 입을 거야?"
"셔츠에 슬랙스 바지 입겠습니다."
"나도 그렇게 입을게~"
.....
또 하루는
"우리 이거 안되면 같이 한강에 들어가야 하는 거야~"
"???? 네? 한강까지요? 저는 회사 그만두겠습니다."
.....
거의 매일 나에게 찾아와,
이런 류의 말을 하곤 하셨다.
그만큼 발표의 중요도를 강조하려 하시는 건가
싶어서 덩달아 긴장도는 높아져 갔다.
드디어 발표 당일!
역시나 출근시간보다 조금 일찍 만나,
마지막 리허설을 하기로 하였다.
들어오는 7호선을 향해
달려가던 그 찰나
눈앞이 깜깜해졌다.
별도 보이는 것 같고
멍했다.
반대편에서 달리던 남자의 어깨에
부딪혀 날아간 것이다.
진짜 거의 날아갔다.
다행히 손으로 짚어서,
머리가 다치진 않았지만
피가 뚝뚝 흘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입술이 터졌다.
(마지막에 사진 넣겠습니다. 그 와중에 엄마아빠한테 보여준다고, 사진도 찍었음..)
아 발표 어떡해!
이 생각만 떠올랐다.
나와 부딪힌 사람이 물과 휴지를 사러 가겠다며
자리를 비웠고, 나는 플랫폼의 벤치에 앉아
흑흑 울었다.
소리 내기에는 창피하고, 얼굴하고 입이 너무 아프고,
발표는 걱정되고 복잡한 마음에 흑흑 또르르 눈물을 흘렸다.
마침 역사에 있던,
병원에서 입술에 연고를 바르고
다시 회사로 향하였는데...
입이 퉁퉁 부은 나를 보고,
그 누구도 괜찮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발표인데, 어떡하냐. 마스크 쓰고 하면 되지 않냐
등등의 말들만 오갔다.
(난 여기서 진정으로 퇴사를 결심했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부었던 입술은 가라앉았고,
내 마음도 진정이 되었다.
마지막 연습을 하고,
발표장 도착 전, 카페에 들렀다.
본부장님은 쉬지 않고 계~~ 속 말씀하셨고,
어젯밤 집에서 야심 차게 준비하셨다던 대본용 갤럭시 패드를 가방에서
찾으시는 순간!
아. 안 가져왔다.
. 네?!!!!
그때부터 나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했다.
지금 도움이 필요하고, 안정이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본부장님이라는 것!
나는 당황해서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본부장님에게 프린트한 스크립트를 드렸다.
협탁에서 진행하는 발표이니
자연스럽게 보시면서 할 수 있을 거라고
응원했다.
발표장에 들어 선 순간
오히려 나는 차분해졌다.
둘 다 긴장해 버리면 정말 망할 것 같은 마음 때문인지
여태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공간의 크기나 인원수에 먹히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발표는 시작되었고,
순서는 본부장님이 먼저였다.
나는 내 자리에 앉아 본부장님의 측면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발견해버리고 말았다.
벌벌 떨고 있는 그의 손.
아! 깨달았다.
그도 나와 별 다르지 않은
긴장한 발표자 1인이라는 것을.
본부장이기 이전에, 수줍음 많고
소심한 사람 1인이라는 것을.
나와 같이 남의 돈 받고(액수는 차이가 크겠지만)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가장이라는 것을.
다행히 발표는 성공적이었고,
우리 회사가 해당 사업건을 수주하게 되었다.
나는 결과를 알고, 콘텐츠 심사까지 합격한 것을
확인한 뒤 미련 없이.
퇴사했다.
나는 아직도 벌벌 떠는 그 손을 기억한다.
상사가 미울 때,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것 같을 때.
가끔 떠올린다.
그의 손을
이 사진 이후
피사진 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