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은 힘이 세다. 눈앞의 현실을 찢고 들어와 실재하는 감각을 마비시키고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비극도 망각 앞에서 희미해질 때가 있다. 삶이 기억의 총체라면 삶에서 빠져나간 기억의 조각들은 더 이상 내것이 아닌 걸까. 시간의 퇴적작용 속에서 어쩔 도리없이 기억은 삶에서 소리 없이 빠져나간다. 망각의 부피는 커지고 비극을 돌아보는 마음은 줄어든다.
1995년 6월 29일 목요일 오후 5시 55분 서초구 서초동 1675-3번지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한 층이 무너지는 데 걸린 시간은 1초에 지나지 않았다.
-정이현 <삼풍백화점> 중-
소설 속 문장을 빌려왔지만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삼풍백화점 붕괴는 실제 일어난 비극이다.
삼풍백화점이 지어진 자리는 원래 거주용 부지였고, 건물은 백화점이 아닌 삼풍아파트 단지의 종합상가인 '삼풍 랜드'로 설계되어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법적 규정은 뇌물거래를 통해서 '그래도 된다'는 인허가를 받는다. 당시 삼풍건살산업 회장 이준은 큰 수익을 내기 위해 삼풍랜드를 삼풍백화점으로 변경한다. 그 과정에서 기존 건설사와 계약 파기와 승인받지 않은 불법개조와 내부 증축이 이뤄진다. 대들보 없이 기둥이 바닥과 직접 연결된 구조의 백화점은 가장 돈이 되는 방법을 모색한다. 5층 바닥에 배수로를 설치하고 온돌이 깔린 식당가를 만들고 쇼핑공간을 넓히기 위해 기둥을 몇 개 없애고 남아있는 기둥의 둘레도 줄이고 철근도 줄인다.
대들보도 없고 기둥도 줄어들고 철근도 부실한 백화점의 상부는 계속 무거워졌다. 위험요인을 잔뜩 짊어진 삼풍백화점의 붕괴를 가속화시킨 하나는 1994년 2층에 들어섰던 삼풍문고. 그리고 결정적인 다른 하나는 에어컨 냉각탑. 지하공간 확보를 위해 옥상에 에어컨 냉각탑을 설치한 것으로도 모자라 소음으로 인한 민원 때문에 냉각탑을 옮기면서도 크레인 대신 비용이 덜 드는 롤러를 사용한다. 그로 인해 옥상 바닥에 균열이 생긴다. 백화점이 무너지기 전부터 붕괴 조짐은 곳곳에서 보였다. 하지만 백화점 경영진들은 사람들에게 이곳이 위험하니 피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옥상이 무너지자 붕괴 7분 전, 경영진부터 백화점을 빠져나갔다. 그 뒤에 대피방송이 이어졌다. 방송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는 데는 20초도 걸리지 않았다. 사망 502명, 부상 937명. 참혹한 비극을 가져온 최악의 붕괴였다.
사진은 95년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 (서울시사편찬위 제공) 2013.1.27/뉴스1
1995년 6월 29일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기에 오히려 그날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선명하게 떠오른다. 누군가는 백화점 롯데리아에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는데 약속시간에 늦었다고 했고, 누군가는 언니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삼풍백화점과 먼 곳에 있었다. 집에 돌아오는 날이었고 기차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친구에게 그 소식을 전해 들었다.
"백화점이 무너졌대."
친구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기차역에 있는 텔레비전에서는 삼풍백화점 붕괴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성수대교 붕괴가 일 년도 되지 않았는데 또다시.
유월을 두 장 남겨놓고 정이현의 <삼풍백화점>을 읽었다. 망각의 힘에 굴복해 잊고 살다가도 기온과 습도가 올라가며 어느덧 여름이 되었구나 싶을 때면 삼풍백화점을 기억하게 된다. 일 년에 한 번뿐이지만 앞으로도 일 년에 한 번씩이라도 기억에서 놓지 말자는 생각이 든다.
소설 <삼풍백화점>은 삼풍백화점 근처 아파트단지에 사는 내가 삼풍백화점에서 일하는 고등학교 동창 R과 우연히 만나서 친밀해졌다가 연락이 끊기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중도우파의 부모님에 강남에서 나고 자란 나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제도권에 진입했지만 대학을 졸업한 다음부터는 취업준비생에 지나지 않은 현실에 우울해하던 시기였다. 취업에 성공했거나 결혼에 성공했거나 둘 다 성공한 스물네 명의 친구와는 연락이 닿지 않았던 나는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접점을 찾을 수 없는 R가 가까워진 것은 잘 닦여진 인생의 경로에서 이탈했다는 낙오감과 열패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해 2월에 만난 나와 R은 봄이 끝날 무렵까지 가까워졌다가 백화점에서 하루 알바를 하게 된 나의 실수로 인해 어색한 관계가 되어 멀어지게 된다. R과 연락이 잘 닿지 않았을 때 동물사료를 수입하는 회사에 취직한 나는 오랜만에 삼풍백화점에 들렀다가 R이 일하던 매장을 지나가지만 R이 보이지 않아 삐삐에 음성메시지를 남긴다.
일 층의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 R의 삐삐번호를 눌렀다. R은 그 흔한 인사말조차 녹음해두지 않았다.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고 나는 음성메시지를 남겼다. 나야, 지나가다 들러봤는데 네가 안 보이네. 간식 먹으러 갔니? 잘 지내지? 나도 잘 지내. 연락도 자주 못하고, 미안해. 회사 다니는 게 그렇더라. 들어오면 씻고 자기 바빠. 오늘은, 그냥 중간에 나와버렸어. 나오기는 했는데 갈 데가 없네. 잘 있어, 나중에 또 올게. R이 나의 메시지를 들었을까. 아직도 나는 모른다.
-정이현 <삼풍백화점> 중-
소설에서 R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음성사서함에 보낸 메시지에 여전히 묵묵부답인 채였고 R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으로 그녀의 부재를 보여준다. 백화점이 무너지던 날 나는 R을 만나지 못하고 지하 일층에 있는 팬시 코너에서 일기장을 샀다.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은 백화점은 후텁지근했다. 유니폼을 입은 판매원들은 오층 냉면접 천장이 무너졌다는 말을 하면서도 웃었다.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아무도 위험하다는 걸 몰랐다.
숨쉬기가 힘들 만큼 후텁지근했다. 유니폼을 입은 판매원들 서넛이 계산대 근처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들었어? 아까 오층 냉면집 천장 상판이 주저앉았대. 웬일인, 설마 오늘 여기 무너지는 거 아니야? 오늘은 죽어도 안 돼! 나, 새로 산 바지 입고 왔단 말이야. 그녀들이 까르르 웃었다. 그것은 정말로 까르르 소리가 나는 웃음이었다. 손님, 사천구백 원입니다. 나는 백 원짜리 동전을 손에 쥐고 그곳을 떠났다.
-정이현 <삼풍백화점> 중-
까르르 웃던 그녀들은 지하 일층에 있었다. 조금만 더 일찍 알려주었다면 백화점이 무너지기 전에 모두 빠져나올 수 있었을 텐데. 경영진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당시 삼풍백화점 회장 이준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여보시오. 무너진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손님들에게도 피해가 가지만 회사의 자산도 잃는 것이요."
지금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던 자리에는 주상복합 아파트가 세워져 있다.
참혹한 비극은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망각의 힘이 아무리 세도 그런 비극이 지나가면 기억의 힘이 좀 더 세진다. 망각의 부피가 커져서 기억이 희미해질 때마다 한 번씩 날카로운 통증이 찾아오듯 기억의 조각들이 제자리를 찾아 돌아온다. 꺼내기에 고통스러운 기억이지만 되새기지 않으면 망각에 눌려버릴지 모른다.
언젠가 모 개그맨이 했던 말 - “오줌을 먹는 동호회가 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21일 만에 구출된 여자도 다 오줌 먹고 살았다. 그 여자가 동호회 창시자” -을 기억한다. 나는 지금도 그 개그맨이 나오는 채널은 보고 싶지 않다. 세월호 막말을 비롯해 그런 막말을 들을 때마다 그들을 지배하는 생각을 혐오한다.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런 표현도 자유라는 이름을 붙여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소설에서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먹은 음식은 칼국수였다. 나는 이 장면이 가슴 아프다. 다시는 함께 돌아와서 먹을 수 없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칼국수가 나왔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칼국수를 우리는 묵묵히 먹었다. R은 나더러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지 않았다. 학교를 졸업했느냐고도 묻지 않았다. 식당에서 나갈 때 R이 계산서를 들었다. 나는 얼른 지갑에서 천 원짜리 넉 장을 꺼냈다. 내 몫의 칼국수 값이었다. 동전 하나까지 정확히 나누는 더치페이가 1990년대 초반 여대생들의 일반적인 계산법이었다. R은 한사코 그것을 뿌리쳤다. 할 수 없이 나는 천 원짜리 넉 장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럼 내가 커피 살게. R이 다시 내 팔짱을 꼈다. 나는 카페 가는 거 솔직히 너무 돈 아깝더라. 차라리 우리 집 갈래? 요 앞에서 버스 한 번만 타면 되는데.
-정이현 <삼풍백화점> 중-
둘이 가까워지기 시작했을 때 R은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취준생인 나에게 열쇠를 하나 내밀었다. 낮에 가 있을 데 없으면 와서 라면도 끓여먹고 책도 읽고 편하게 있으라는 말을 하면서. 나는 삼풍백화점 붕괴에서 십 년이 지나도록 책상 서랍 속에 두고 있었지만 한 번도 R의 집을 열고 들어간 적은 없었다. 그녀를 잊지 않는 것으로 R의 부재를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망각은 힘이 세지만 기억도 그에 못지않은 힘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