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휴머니스트

로맹 가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by 페이지

절벽에 매달린 사람의 손이 작은 돌부리를 붙잡고 있다. 땀이 흐르는 손아귀에서는 힘이 빠져나가고 발아래로는 아득한 허공이 펼쳐져있다. 두 손의 힘만으로 버티기에는 몸이 너무 무겁다. 조금이라도 무게를 덜기 위해 그는 신고 있던 구두를 벗었다. 애초부터 발에 맞지 않던 뒷굽이 무거운 가죽구두였다. 발에서 벗어나자마자 구두는 무섭게 떨어졌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는 구두의 마지막 종착지가 어디일지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이런 곳에서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다며 손아귀에 힘을 더 줬다. 혼자 맞이하는 마지막은 고독했다. 세상에 태어나 떠도는 동안 그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늘 고독과 함께였다.


모스크바에서 유태계로 태어나 남프랑스로 건너와 프랑스인으로 살면서 법학을 공부했고 전쟁에 참여했으며 천재라는 명성을 얻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을 썼다. 그럼에도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를 담기에 자신의 존재만으로 부족했는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자기 앞의 생>을 써서 문단을 떠들썩하게 했으며 권총으로 생을 마감하면서 남긴 마지막 글에 "나는 마침내 나를 완전히 표현했다."라고 적었던 사람. 그가 죽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기 전까지 완전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던 것은 '인간의 정체성'이었다. 로맹 가리이자 에밀 아자르. 생의 마지막 순간, 그가 내린 결론은 무엇이었을까.


다시 절벽. 나는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읽고 절벽에서 돌부리를 붙잡고 있는 사람을 떠올렸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죽음과 고독에 휩싸여 있는. 그럼에도 그는 아직 돌부리를 붙잡고 있다. 만약 그가 '고독의 물결'에 몸을 맡긴다면 돌부리에서 손을 떼면 된다. 만약 그 순간이 되면 '아마도 희망'이라는 단어가 적혀있는 그의 손바닥에 활짝 펼쳐지며 허공을 가르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읽고 나면 시선이 발끝을 향하게 된다. 발끝을 보고 한자리에서 맴돈다. 시선이 발끝에서 눈앞의 길을 향해도 손에 들고 있는 지도를 해독하지 못해 길을 찾지 못한다.

표제작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에서부터 길을 잃었다. 스페인 내전,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쿠바의 전투를 거친 뒤 안데스 산맥 발치의 페루 해변에서 카페를 하며 정착한 마흔일곱의 레니에가 서있는 해변에 쌓이는 새들의 죽음 때문이었다. 또한 "이런 얼굴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라고 중얼거리며 거울 속 자신을 확인하는 레니에의 얼굴 때문이기도 했다. 고독의 물결에 몸을 맡기면 그는 더 이상 카페 주인으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직 그가 카페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희망을 적은 손바닥을 마지막을 향해 펼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첫 번째 소설을 지나면서 좀 더 독서에 속도가 붙었다. 시적 표현이 줄어들면서 좀 더 단순해진 길로 들어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짧은 이야기들 속에는 인간에 대한 날카롭고 묵직한 통찰이 스며있었다. 안정된 삶을 유지하기 위해 평생 비밀을 품고 경직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여인을 그린 <류트>, 사람에 대해 무한한 믿음을 보냈다가 비극을 맞이하는 남자를 그린 <어떤 휴머니스트> 지나 '아버지의 세대와 전혀 다른' 세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며 인류의 진화(소설에서는 기존의 인류와 전혀 다른 외형으로 변해가는)에 대한 <우리 고매한 선구자드라에게 영광 있으라>에 이른다.

로맹 가리는 전혀 다른 세대가 만들어졌으며 기존의 질서로는 해결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깨달았던 같다. 기존 세대의 틀과 언어를 가진 자신이 표현할 수 없는 세계를 예감했겠지.


책에 수록된 열여섯 편의 소설 중 <어떤 휴머니스트>를 다시 읽었다. 여섯 페이지 반에 해당되는 아주 짧은 소설 속에서 섬뜩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유태계 독일인인 칼은 장난감 공장을 운영하는 쾌활한 낙관주의자이다. 독일에서 히틀러가 권력을 잡고 유태인 탄압을 시작했을 때, 미국으로 함께 떠나자는 친구들의 권유에도 그는 괜찮다며 낙관적인 모습을 잃지 않았다. 1차 대전 당시 참호에서 우정을 맺었던 전사들이 자신을 위해 힘을 써줄 거라 믿었다. 칼은 인간성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친구들이 미국으로 떠난 다음부터 상황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칼은 장난감 공장에 접근금지를 명령받았고 정복 차림의 청년들에게 심각한 폭행을 당했다. 전우들은 연락을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칼은 자신의 서재를 채운 책들을 보며 혼란스러운 인간성이 다시 회복될 거라고 믿었다.


"오래도록 심각하게. 모여 있는 그 귀한 책들은 하나같이 인간의 편을 들고 옹호하고 변호하면서 칼 씨에게 용기를 잃지 말라고, 절망하지 말라고 간곡히 말하고 있었다. 플라톤, 몽테뉴, 에라스무스, 데카르트, 하이네..... 이들 고매한 선구자들을 믿어야 했다. 인내심을 가져야 했고, 사람들이 인간성을 드러내고 혼란과 오해 가운데에서 방향을 잡고 극복할 시간을 주어야 했다."

-로맹 가리 <어떤 휴머니스트> 중-


칼은 인간성이 회복될 때까지 숨어 지낼 은신처가 필요했다. 그는 십오 년 동안 자신의 집에서 일해온 독일인 하인 슈츠 부부에게 부탁해서 서재 마룻바닥에 구멍을 뚫어 지하실과 연결시킨 다음 계단을 설치했다. 원래 있던 지하실 출입구는 막았다. 은신처에는 서재에 있던 물건 대부분과 포도주와 질 좋은 술들이 놓였다. 안락한 은신처를 마련한 뒤 칼은 슈츠와 마지막으로 외출해서 자신의 집과 공장을 슈츠에게 매각한 것처럼 서류를 꾸몄다.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모든 재산은 몰수되었을 것이다. 착한 하인 슈츠는 '때가 되면 적법한 소유자에게 재산의 소유건을 돌려줄 수 있도록 필요한 서류들과 반대 증서를 작성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고, 그렇게 했다. 그런 다음 칼은 좋은 시절이 돌아올 때를 기다리기 위해 은신처로 내려갔다. 충실한 슈츠 부부는 하루 두 차례, 칼에게 맛있는 요리와 좋은 포도주를 가져다주었다.


하루 두 차례, 정오와 일곱 시에 슈츠가 양탄자를 들어 올리고 사각형의 나무를 빼내면, 그의 아내는 맛있는 요리와 좋은 포도주 한 병을 들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슈츠는 매일 저녁 그곳에 와서 친구이자 고용주인 그와 더불어 인간의 권리 관용, 영혼의 영속성 독서와 교육의 미덕 같은 고상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럴 때면 고결하고 관대한 그런 견해들로 인해 그 작은 지하실이 환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로맹 가리 <어떤 휴머니스트> 중 -


칼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점점 나쁜 쪽으로 흘러갔다. 그는 '인간의 본성 속에 간직되어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신념을 일시적인 정황의 반향으로 위협당하지 않기 위해' 라디오를 치우고 더 이상 뉴스를 듣지 않았고 신문을 읽지 않았다. 오직 '서재에 꽂힌 걸작들'만을 되풀이해서 읽으며 인간성 회복에 대한 신념을 지켜갔다.

그 결과 칼은 지하실에서 전쟁이 끝난 줄도 모른 채 슈츠 부부가 가져다주는 저녁에 감사하며 지냈다. 슈츠 부부는 칼에게 종전 소식 대신 히틀러가 영국을 점령했다는 등 악화된 전쟁 소식만을 들려준다. 슈츠는 그럴 때마다 '인간성은 결국 승리한다고, 그런 신념과 믿음 속에서 위대한 걸작들이 태어날 수 있었다'며 칼을 다독였다. 혈색이 좋고 건강했던 칼은 슈츠의 선한 가면에 속은 줄도 모르고 여전히 희망을 기다린다. 자신이 기다리던 세계와 도래했음에도 알지 못한 채. 은신처에서 그는 고독하게 늙어갔다.


매일 아침 슈츠 부인은 싱그러운 꽃을 한 다발 들고 내려가 미스터 칼의 침대 머리맡에 놓는다. 그녀는 칼의 베개를 다독여주고, 그를 도와 자세를 바꿔주고, 이제 스스로 숟가락질을 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그에게 음식을 먹어준다. 이제 칼은 겨우 말만 할 수 있을 정도다. 때때로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오르고, 두 부부와 인류 전체에게 품어온 자신의 믿음을 그토록 충실히 지켜준 선량한 이들의 얼굴을 감사에 찬 눈길로 바라본다. 자신의 신념이 옳았다는 만족감 속에서 그는 양손에 충직한 친구들의 손을 잡고 행복하게 죽어가리라.

-로맹 가리 <어떤 휴머니스트> 중-


인간성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던 칼의 잘못은 무엇인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휴머니스트 칼은 대책 없는 희망을 품고 책 속으로 숨어들었다. 활자로 이루어진 세상 속에 오랫동안 유영하며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활자와 활자 사이의 빈틈에서도 인간성의 의미를 찾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유영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가 발을 올라서야 하는 세계의 덩어리는 멀어져 갔다. 책 속에서 건져 올리는 것은 각자 다르다. 활자의 규칙적인 배열과 아름다운 구조나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이 주는 정신, 흥미진진하여 상상력을 자극하는 서사가 될 수도 있다. 칼은 그 속에서 인간성에 대한 믿음만을 보았고 그것만을 건져 올렸다. 그러한 과정에서 현실은 배제되었다. 고매한 책의 언어와 정신을 감상만 했을 뿐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지 못했다. 언어를 통해 세계를 비춰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고매한 이들이 만든 세계 속에서 길을 잃었다. 결국 현실로 올라오는 길조차 잃었다.


가면을 쓰고 선한 대리인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슈츠 부부의 모습에서 한치의 죄책감도 엿볼 수 없다.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 대신 거짓으로 꾸민 전쟁의 참혹함을 전하며 칼이 세상으로 나오는 길을 막아버린 그들을 통해 로맹 가리는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모든 행동과 결과에는 설명이 뒤따라야 한다.

새들이 죽어 시간처럼 쌓이는 해변에 서있던 레니에라면 칼에게 이런 말을 해주지 않았을까. "한 가지 설명은 있어야 하고 언제나 있을 테지만 모른들 무슨 상관이랴. 과학은 우주를 설명하고, 심리학은 살아 있는 존재를 설명한다. 하지만 스스로를 방어하고, 되어가는 대로 몸을 맡기지 않고, 마지막 남은 환상의 조각들을 빼앗기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레니에의 말처럼 스스로 방어하지 않고 '마지막 남은 환상의 조각'마저 빼앗기면, 칼처럼 현실로 올라오는 길을 영영 찾지 못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참혹한 전쟁 속에서 인간성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칼의 식사를 지켜보는 일은 고통스럽다. 침대에서 내려올 힘도 숟가락을 들 힘도 없는 칼은 슈츠 부부가 주는 대로 먹는다. 선량한 슈츠 부부의 가면과 현실로 올라오는 길을 잃은 칼의 인생은 고독하다.

새들이 왜 페루에 가서 죽느냐고 누군가 물어왔다. 대답할 수 없었다. 한 가지는 이유는 있겠지만 정확한 설명이 될 수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한때 태양이 다스렸던 페루의 몰락을 견딜 수 없어서. 이렇게 대답할 수도 없었으니까.


새들이 왜 먼 바다의 섬들을 떠나 리마에서 북쪽으로 십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이 해변에 와서 죽는지 아무도 그에게 설명해주지 못했다. 새들은 더 남쪽도 더 북쪽도 아닌, 길이 삼 킬로미터의 바로 이곳 좁은 모래사장 위에 떨어졌다. 새들에게는 이곳이 믿는 이들이 영혼을 반환하러 간다는 인도의 성지 바라나시 같은 곳일 수도 있었다. 새들은 진짜 비상을 위해 이곳으로 와서 자신들의 몸뚱이를 던져버리는 것일까. 피가 식기 시작해 이곳까지 날아올 힘밖에 남아있지 않게 되면, 차갑고 헐벗은 바위뿐인 조분석 섬을 떠나 부드럽고 따뜻한 모래가 있는 이곳을 향해 곧장 날아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 설명들로 만족해야 하리라.

-로맹 가리 -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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