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꺼지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 가끔은 어둠에 기대고 있을 때 오래 묻어두었던 진심이 나오는 법이거든. 환한 불빛 아래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수도 있어. 네가 그걸 원한다면 말이야. 하지만 처음에는 불이 꺼진 어둠 속이 서로에게 안전할 것 같아. 눈의 오만과 편견이 나의 진심을 가릴 수 있으니까. 앞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믿어버리는 편협한 세계를 가진 가여운 눈.
어둠 속에서도 눈을 감고 식탁 앞에 앉아봐. 지금, 아무것도 보이지 않겠지만 식탁에는 우리의 부모와 우리의 고향을 떠올릴 만한 음식들이 차려져있어. 기억의 더께에 눌려있던 감각들을 흔들어 깨우면 알게 될 거야.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던 감각들이 되살아나면 따뜻한 스튜를 함께 먹자. 매콤하고 시큼한 향신료의 맛이 우리 주변을 떠다니다 머리카락에 어깨에 조심스레 앉아서 기억의 조각들을 불러다줄 테니까.
목소리를 들려줘. 내게 하지 못했거나 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을 채워줘. 기억이 끊기지 않도록 너의 이야기를 멈추지마. 상처가 벌어지라도 우리의 이야기는 계속되어야만 해.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식탁에 놓인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촛불 하나만 켜 놓은 채로.
오늘부터 닷새 동안 오후 여덟 시부터 한 시간 동안 단전이 된다는 안내문 앞에서 쇼바와 슈쿠마가 보인 반응에는 미묘한 비난의 감정이 섞여 있었다. 교정지가 들어있는 불룩한 가방을 멘 쇼바가 "이런 일은 낮에 해야 하는데"라며 단전 시간에 대해 불평하자, "내가 집에 있을 때 말이지."라고 하는 슈쿠마. 젊은 부부 사이에 드러내지 않는 가느다란 긴장의 끈이 팽팽히 놓여있다.
육개월 전, 쇼바는 유산을 했다. 예정일보다 삼 주나 진통이 왔고 아이는 사산되었다. 볼티모어로 학술 대회에 갔던 쇼바가 돌아오기 전에 모든 상황이 종료되어 있었다. 그날의 일에 대해 두 사람은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그저 슈쿠마는 쇼바가 금세 회복되리라고 믿었다.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눈이 보는 세계는 편협하니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될 일이었는데, 그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었다. 만약 그가 쇼바의 어깨를 안으며 오랜 시간을 들여 그녀의 말을 들어줬다면 아기를 잃은 상실감에서 좀더 벗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슈쿠마는 그렇게 하는 대신 아기방에 있던 체리색 아기 침대와 회녹색 손잡이가 달린 희색의 기저귀 갈이대, 체크무뉘 쿠션이 놓인 흔들의자를 모두 치웠고 장식용 그림을 문질러 없앴다. 아기의 가능성과 관련된 모든 흔적을 없앤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책상을 그곳에 두었다. 쇼바가 피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아기를 잃은 뒤부터 두 사람은 서로를 피해 다니기만 했다. 침실이 세 개인 집안에서 서로 다른 방을 차지하고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식사는 가스레인지에서 각자의 몫을 접시에 덜어서 다른 방에서 따로 먹는다. 쇼바는 주로 거실에서, 슈쿠마는 아기방이었지만 지금은 개인 작업실로 사용하는 방에서 먹는다.
그들의 결혼생활에서 남아있는 거라고는 법적인 관계와 과거의 기억에 의존한 습관 정도 뿐이었다.
두 사람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을 때, 집안에는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식재료가 넘쳐났다. 요리는 쇼바가 했다. 그녀는 모든 상황에 미리 대비하는 사람이었는데, 장을 볼 때도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물건을 샀다. 그렇게 많이 구입한 재료들을 재빨리 손질해서 미리 냉동하거나 병에 넣어두어 빠르게 요리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갖추었다.
앞일을 생각하는 그녀의 능력에 깜짝 놀랐다. 그녀가 쇼핑을 하고 나면 식료품 저장고에는 늘 여분의 올리브와 옥수수기름이 여러 병 들어있었다. 이탈리아 요리를 할지 인도 요리를 할지에 따라 달라지긴 했지만,. 또한 온갖 모양, 온갖 색깔의 파스타가 든 상자와 지퍼백에 든 바스마티 쌀이 엄청 많았고, 헤이마켓의 이슬람 정육점에서 산, 적당한 크기로 잘라 냉동한 양고기와 염소 고기가 담긴 비닐봉지도 곳곳에 놓여 있었다. 격주로 토요일이면 미로 같은 좌판 시장을 훑고 돌아다닌 덕에 슈쿠마는 드디어 그곳을 훤히 꿸 수 있게 되었다.
-줌파 라히리, <일시적인 문제>-
아기를 잃은 뒤부터 쇼바는 집안일에서 손을 뗐다. 아침부터 밤까지 집안에서'인도 소작쟁의'를 다룬 논문에 골머리를 썩다가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이 더 많아진 슈쿠마가 요리를 했다. 그는 쇼바가 적어놓은 요리책을 뒤적여서 쇼바가 엄청나게 많이 사놓았던 식재료들을 사용해 요리를 했다. "손자 대까지 맛볼 수 있을 만큼 많은 양이라는 데 둘은 의견의 일치"를 보았지만 그 식재료들마저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단전이 시작된 첫 날, 두 사람은 함께 식탁 앞에 앉았다. 어둠 속에서 식사를 할 수 없으니 촛불이 있는 식탁으로 온 것이다. 집안에서 양초를 찾지 못한 슈쿠마는 싱크대 창턱에 놓아던 담쟁이 덩굴이 담겨있는 화분의 말라붙은 흙에 물을 뿌리고 생일 양초를 꽂기로 한다. 손님용으로 아껴두는 접시와 와인 잔도 올린다.
식탁에 오른 요리는 로간조시. 마늘 생강 계피 정향 등이 들어간 양념에 염소고기나 양고기를 조려서 만든 인도 음식. 따뜻한 붉은 빛깔의 스튜를 먹고 와인을 마시며 그들은 인도를 느낀다.
사실 쇼바는 인도에 살았던 경험이 있지만 슈쿠마는 어릴 적 여행처럼 갔을 뿐 살았던 적은 없다. 자신이 쓰고 있는 인도 소작쟁의에 대한 논문도 인도에 대한 체화된 인식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인도를 역사책으로 배웠다. 쇼바가 인도에서 보낸 어린시절의 기억을 소환한다. 그때 할머니 댁에서 정전이 되면 어떤 이야기든 이야기를 했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그녀는 슈쿠마에게 제안한다. 어둠 속에서 서로 얘기하기를.
"우리, 그거 하자. " 쇼바가 갑자기 말했다.
"뭘?"
"어둠 속에서 서로 얘기하기."
"어떤 얘기? 난 농담 같은 거 모르는데"
"아니,농담 말고." 쇼바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우리가 전에 얘기한 적이 없는 것들을 말하는 건 어떨까?"
-줌파 라히리, <일시적인 문제> 중
전등을 꺼지고 생일 양초만이 식탁에 올려진 음식을 비추고 있다. 두 사람의 얼굴은 촛불의 일렁거림에 따라 움직일 뿐 선명하지 않을 것이다. 어둠 속이라면 어떤 이야기가 적당할까. 한번도 털어놓지 못했거나 털어놓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
슈쿠마의 아파트에 처음 갔을 때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는지 보기 위해 주소록을 슬쩍 들춰봤다는 쇼바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둘이 처음 저녁을 먹으러 갔던 포르투갈 식당에서 팁 주는 걸 잊어버렸다는 슈쿠마의 이야기까지.
생일 양초가 다 타버릴 때까지 두 사람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졌다.
다음 날, 두 사람은 평소보다 일찍 저녁식사를 했다. 그리고 식사 후에는 쇼바가 미리 사서 연꽃모양의 놋쇠 촛대에 꽂아둔 양초를 하나씩 들고 나와 현관 계단에 앉았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슈쿠마의 어머니가 집에 왔을 때 야근이 있다는 거짓말을 하고서는 친구와 밖에서 마티니를 마셨다는 쇼바. 대학의 마지막 학기 시험에서 친구의 답안지를 보고 베꼈다는 슈쿠마.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두 사람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그들은 어둠 속 이야기의 영향력을 알지 못한 채 (아마 쇼바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준비가 철저한 사람이었으니) 계속 해나간다. 어리석은 눈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두 사람의 목소리는 낮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친밀감을 되살려냈다. 네 번째 날 밤, 그들은 이야기를 마친 뒤 함께 침대로 들어가 밤을 보낸다.
단전이 예상보다 일찍 끝났다는 안내문을 보고 슈쿠마는 실망감을 느꼈다. 쇼바를 위한 요리를 마음도 사라져버려 식료품 가게에 있는 재료들도 한결같이 불품없이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서로 묻어놓았던 이야기를 했던 두 사람은 단전이 끝났음에도 촛불을 켜고 침묵 속에서 마지막 저녁식사를 한다.
밀랍 양초를 켜놓은 어두운 방에서 그저 식사만 했다. 어색한 침묵의 시간을 견뎌냈다. 새우 요리를 먹어치웠다. 그리고 와인 한 병을 다 비우고는 두 번째 병을 마시기 시작했다. 밀랍 양초가 거의 다 탈 때까지 함께 앉아 있었다.
-줌파 라히리, <일시적인 문제> 중-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쇼바는 갑자기 전원을 켜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둠 속 이야기를 기대했을 쇼바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쇼바는 말했다. "당신, 내 얼굴을 보며 지금 하는 말을 들어주었으면 해."
아파트를 알아보고 있었는데 하나 찾았다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고통을 겪었다고.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고. 임대 보증금을 마련하려고 돈을 저축했고 집에 오기 전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고.
쇼바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이 꺼냈던 종류와 전혀 달랐다. 쇼바는 그런 이야기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소소한 비밀을 털어놓았던 시간들. 양초가 그려내는 작은 빛의 둘레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던 친밀한 시간들. 쇼바는 불이 꺼진 속에서 두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 받았던 시간들에서 결혼생활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를 품었을 것이다.
쇼바가 이야기를 꺼냈으니 이제는 슈쿠마 차례인가. 나는 그가 부디 현실을 뒤흔들 정도로 아픈 진실을 꺼내지 말기를 바랐다. 상처를 상처를 갚지 않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상처를 입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몇 가지 안 되는 방법 중에서 그는 가장 해서는 안 될 것을 선택한다. 그는 '그녀에게 결코 말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한 것'을 털어놓는다.
"우리 아이는 사내아이였어." 그가 말했다. "피부는 갈색보다는 붉은색에 더 가까웠어. 머리털은 검정색이었지. 몸무게는 2.3킬로그램 정도였고. 손가락은 꼭 오므리고 있었어. 당신이 잠들었을 때처럼 말이야."
-줌파 라히리, <일시적인 문제>-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손바닥으로 꾹 눌러버린 것처럼 쓰리고 쓰린 말.
소설은 두 사람이 "이제 자신들이 알게 된 사실 때문"에 울면서 끝을 맺는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윤곽선으로 남은 두 사람이 앉은 식탁이 관객 없는 연극무대처럼 쓸쓸하게 다가온다.
<일시적인 문제>는 단전이라는 일시적인 상황을 부부가 겪고 있는 갈등과 소통 부재의 문제와 맞물려 풀어나간다. 불이 꺼질 때 숨겨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던 두 사람은 불이 켜지는 상황에서 정말 꺼내서는 안 될 진실을, 서로를 향해 던진다. 생일양초를 꽂을 흙이 말라서 물을 주고 손님용으로 넣어놓았던 접시와 와인잔을 꺼내어 식탁을 차렸던 슈쿠마의 노력은 너무 늦었던 걸까. 모든 일에는 적절한 순간이 있는 법이다. 만남에도 사랑에도 사과에도 위안에도 예외는 없다
행복했던 과거의 결혼생활과 냉랭한 현재의 결혼생활을 교차해서 보여주는 방식이 담담해서 더 애잔하다.
《축복 받은 집》에는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대부분 소통의 부재와 결핍, 오해로 인해 벌어지는 비극적 상황들을 이끌어내는 내용들이다. 가장 마음에 남았던 소설은 <일시적인 문제>와 <축복받은 집>이었고, 마음이 아렸던 소설은 <피르지다 씨가 식사하러 왔을 때>였다. 몇몇 부분에서 최은영의 <신짜오, 신짜오>를 떠오르게 하는 소설이기도 했다.
불이 꺼지고 어둠 속에서 눈을 감을 때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목소리가 전하는 진실에 닿을 수는 있을까.
+ 서랍에 넣어두었던 글인데, 1시간 전에 잘못 눌러서 삭제되었다. 기억을 더듬어 써야해서 힘이 들었고 배가 몹시 고파졌다. 일해야 하는데. :(
+음식이 나오는 소설을 읽는 중이라서 선택의 폭이 좁다. 매 끼니를 챙겨먹듯 매일 잘 읽고 잘 쓰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