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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름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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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Jul 03. 2020

여름 거짓말

행복을 연기하는 삶

 기나긴 여름이 시작되었다. 푸릇하던 나뭇잎에서 푸른빛이 빠져나가고 그늘에 숨어도 넓게 펼쳐지는 햇살이 따라오는 계절이다. 비가 그치고 무덥고 습한 날이 이어졌다. 길을 걷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적운이 새하얗게 걸린 하늘이 너무 예뻐 가슴 한켠이 아릿했다. 유년의 어느 여름, 옥상에 누워서 봤던 구름과 거의 비슷하게 보였지만 그 구름과 전혀 다른 구름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여름이면 어떤 이야기가 시작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곤 했다. 하지만 길고 지루한 더위만 가져왔을 뿐 여름은 이야기 하나 남기지 못한 채 끝나버릴 때가 많았다. 주어진 삶이 기대했던 것처럼 특별하게 들려줄 이야기도 없이 시시하게 끝나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 때 누군가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내가 살아온 삶은 이러했고 내가 가꿔온 사랑과 행복은 이러했다고. 자신의 이야기에 반드시 진실만이 포함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거짓이 칠 할인 이야기 속에서 행복을 찾는 편이 효과적일 수도 있다.

 


 

 "거짓과 진실 중 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여름 거짓말>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책에 수록된 일곱 편의 단편소설 속 인물들은 각자 거짓말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 진실을 말해야 하는 순간에 거짓을 말하거나 상대가 알아야 하는 진실을 감추는 식으로 교묘히 순간을 벗어난다. 그들이 거짓을 말하는 이유는 고통이 없는 삶 속에서 행복해지고 싶기 위해서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행복에 흠집이 될 만한 거짓의 요소들을 진실로 칠갑하여 자신이 쌓아 올린 평온한 삶을 유지하려는 의도적 선택이다. 거짓을 이야기하면서도 죄책감을 느끼는 대신 행복을 위해서라고 자위한다.

 얼핏 보기에 각 인물의 삶은 행복해 보인다. 불행을 피하여 평온을 선택했으니 행복한 삶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그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나 혼자 남겨졌을 때 느끼는 고독과 불안은 위태롭게 다가온다. 행복에 대한 당위가 행복의 체감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행복하고자 했던 그들은 삶의 어느 지점에 가서 자신들이 진정으로 행복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 자각의 밑바닥에는 진실을 가리기 위한 거짓의 무게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행복한 삶이 아닌 행복을 연기하는 삶을 살았고, 한순간 그런 삶의 허상에서 깨어난다. 행복을 연기했던 가면을 벗기에 너무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각 단편에서 보여준 행복을 연기하는 가면을 위한 거짓을 들여다보자면,


 <성수기가 끝나고> - 성수기가 끝난 휴가지에서 만난 여자과 사랑에 빠져서 결혼을 약속한 남자는 자신의 이랑에 대해 많은 사실들을 숨기는 것으로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휴가가 끝나고 돌아온 자신의 일상이 여자와 합쳐진 삶으로 연결되는 것에 부담을 느낀다. 새 삶을 시작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시작의 시간을 계속 미룬다.


"중요한 것은 결단을 내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결정을 내렸다. 옛 삶을 버리고 수전과 새 삶을 시작하기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는 대로.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여건이 형성되면 그렇게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로 결 정을 내리고 나면 그렇게 할 것이다. 그렇게 할 것이다. 다만 지금은 아니다."       -<성수기가 끝나고> 중-



<바덴바덴에서 보낸 밤> - 오래 사귄 애인을 속이고 마음 편한 여사친과 함께 호텔에서 보낸  애인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지만 거짓이 지나간 자리에서 믿음이 자라날 수 있을까.


 "그래요, 진실은 당신을 정말로 괴롭혀요. 그러면 당신은 욕을 하고 차라리 진실과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지요. 그러나 나중에 가서 당신을 괴롭히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진실과 얽힌 것들임을 깨닫게 돼요."

         -<바덴바덴에서 보낸 밤> 중-



<숲 속의 집> - 부부 소설가. 독일인 남편은 촉망받는 신예작가로 미국에 왔다가 역시 신예작가인 케이트를 만나게 된다. 둘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한다. 그 이후 케이트를 세계적으로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지만 남편은 제대로 된 작품 하나 내지 못한다. 남편은 자신이 꿈꿔왔던 가정을 지키기 위해 케이트가 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차단하기 위해 나무를 쓰러뜨려 전봇대의 전선을 끊어버린다.

 

"아무도 케이트에게 수상 소식을 전하지 못하고 수상식장에도 초대하지 못했으면. 아무도 그녀를 도시로 끌어내 인터뷰나 토크쇼, 만찬 같은 걸로 괴롭히지 못했으면. 눈이 녹았을 때에야 상이 케이트에게 전해졌으면. 그러면 그녀는 지금보다 훨씬 더 기뻐하겠지. 그러나 야단법석은 금세 지나가고, 그녀의 세계가 변함없이 그대로 있었으면."     -<숲 속의 집>- 중



<밤의 이방인> - 비행기에서 만난 베르너 멘첼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여권까지 빌려준 남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에 이성을 빼앗겨 진실을 보지 못했던 그는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눈에 띄는 멋진 한 쌍이었습니다. 우리는 남에게 우리의 모습을 기꺼이 보여주어썽요. 좀 피상적으로 들린다고요? 열정보다는 허영심의 냄새가 난다고요? 피상적이지 않았어요. 우리 둘은 멋진 삶을 사랑했어요. 세상이 아름답다고 그리고 우리가 아름다운 세상 속으로 아름답게 들어갈 수 있을 때를 사랑했어요."

               -<밤의 이방인> 중-



<마지막 여름> - 암 진단을 받은 은퇴한 교수는 가족들과 여름휴가를 보내는 중이었다. 그는 고통이 심해지면 아무도 모르게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한 약을 몰래 숨겨놓았다. 때가 되면 약을 먹고 의자에 앉아 잠을 자듯 죽으려는 계획은 아내가 약병을 발견함으로써 무너졌다. 가족들은 그에게 배신감을 느끼며 모두 떠났고 여름 휴가지에 그는 홀로 남았다.


 "모두가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 사실을 아무도 알아서는 안 돼. 고통이 점점 심해지고 있어.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지면 작별을 하려 한 거야. 그게 뭐 잘못된 거냐?"  -<마지막 여름> 중-



<뤼겐 섬의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 평생 아버지와 친밀감을 느끼지 못했던 아들이 아버지에게 섬에서 하는 바흐 축제에 가자고 제안한다. 부자 간에 공통점은 바다와 바흐를 좋아하는 것뿐이었으니. 극적인 관계 회복은 없었지만 아버지의 삶에서 외로움을 알 수 있게 된 아들. 빗줄기가 쏟아지는 차에서 바흐의 모테트가 흐른다.


 "바흐는 서로 적대적인 것들을 화해시켜준단다. 밝은 것과 어두운 것, 강한 것과 약한 것, 지나간 것과...."

   -<뤼겐 섬의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중-



<남국여행> -어느 아침 자식들에 대한 사랑과 삶에 대한 기쁨을 잃고 과거 대학을 다녔던 도시에서 옛사랑과 재회하게 된 여인. 혼자 아파트로 돌아와 행복을 위해 자신이 버렸던 진실에 대해 돌아본다.


 "나는 모든 것에 대해 늘 실제로 일어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상상해보곤 해요. 내가 끝까지 공부를 하고 일을 했으면 어땠을까?..... 인생을 그렇게 의무와 책임의 톱니바퀴로만 보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당신이 내게서 떠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남국 여행> 중-

               


 일곱 편의 소설은 모두 여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름이 시작되거나 끝날 무렵과 맞물려있다.

여름은 이제 시작이고 앞으로 지루하게 펼쳐질 것이 분명한데, 책을 덮고 난 뒤 여름이 한꺼번에 훌쩍 지나가버린 것만 같았다. 삶에서 만나는 여름 속에서 우리는 많은 거짓말을 하고 후회를 하겠지만 진실이 없는 것처럼 지나쳐버리지는 말기를. 행복을 연기하는 삶은 끝내 행복에 닿지 못할 테니 마지막을 위해 진실을 더 남겨두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 <책 읽어주는 남자>로 널리 알려진 작가는 독일인 아버지와 스위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하이델베르크 대학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우리나라에는 한국 최초의 세계문학상인 박경리 문학상 4회 수상자로 선정되어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최종 후보자 5인에는 베른하르트 슐링크(독일)를 비롯해 안토니아 수전 바이어트(영국), 존 반빌(영국), 줄리언 번스(영국), 밀란 쿤데라(체코 출신 프랑스 망명)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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