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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름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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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Jul 06. 2020

바깥은 여름

계절을 빼앗긴 사람들의 독백

 푸른 벽을 배경으로 두 개의 문이 있다. 하나는 닫혔고 다른 하나는 열렸다. 오른손으로 문고리를 잡은 여자는 안쪽으로 몸을 밀어 넣고 있다. 여자의 얼굴과 몸의 반은 문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얇은 여름원피스와 짧은 머리카락과 드러난 목덜미만으로는 여자가 문의 안쪽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다.

 밝고 단정한 빛으로 평온한 바깥과 달리 문의 안쪽은 여름의 그늘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자 중심에서 멀어진 구석이며 관심에서 사라진 아득한 시간이다. 빛이 닿지 않는 한 그늘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곳에 모여 슬픔을 삼킨 이들의 독백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여자가 살짝 열린 문으로 들어가려 한다. 아니 어쩌면 문 바깥으로 나오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바깥은 여름》을 처음 받아 들었을 때 겉표지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전체적으로 푸르고 환한 색채가 여름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음에도 그늘진 문 안쪽으로 반쯤 들어선 여자의 뒷모습에서 바깥이 아닌 안쪽의 이야기가 시작되겠구나 싶었다.

 책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은 푸른 빛으로 눈부시고  웃음과 노래가 흐르며 반짝이는 여름의 두꺼운 층을 가른 다음 그 안에 오랫동안 고여서 흐르지 못한 슬픔과 고통에 관한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바깥은 여름인데 어쩔 도리없이 눈부신 그 계절을 빼앗긴 사람들이 머문 곳.

 

<입동> - 어린이집 버스에 목숨을 잃은 아이에 대한 슬픔에 힘들어하는 부부에게 더 힘든 것은 이웃들의 편견과 오해가 쌓인 시선이다. 한밤중 아이를 가슴에 묻고 남은 생을 살아가기 위해 벽지를 새로 바르던 부부는 아이가 자주 들어가 있던 식탁 아래에서 아이의 흔적을 발견한다. 아직 한글을 떼지 못한 아이가 쓴 이름. 성인 '김'과 영우라는 이름에서 '이응' 뿐인 구불구불하고 서툰 글씨. 입동의 찬 바람이 새어들던 밤, 새로 바를 벽지를 두 팔 높이 들고 있던 부부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진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탄식과 안타까움을 표한 이웃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기 시작했는지. 그들은 마치 거대한 불행에 감염되기라도 할 듯 우리를 피하고 수군거렸다. 그래서 흰꽃이 무더기로 그려진 벽지 아래 쪼그려 앉은 아내를 보고 있자니, 아내가 동네 사람들로부터 '꽃매'를 맞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많은 이들이 '내가 이만큼 울어줬으니 너는 이제 그만 울라'며 줄기 긴 꽃으로 아내를 채찍질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

나는 멍하니 아내 말을 따라 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

         -<입동> 중


<노찬성과 에반> - 노찬성은 고속도로 휴게소 근처에서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초등학생. 에반은 휴게소에 묶여있다가 노찬성에 의해 구조되어 함께 살게 된 개. 휴게소에서 식당일을 하는 할머니는 에반을 키우는 걸 반대했지만 찬성은 자신이 책임지겠다며 고집한다. 하지만 이 년이 지났을 때 개로서는 너무 많이 살았던 에반은 암에 걸렸고 동물병원에서는 안락사를 권유한다. 안락사 비용은 십만 원. 에반을 편안하게 보내기 위해 찬성은 전단지 돌리는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결국.... 드라마 '호텔 델루나'에서 구찬성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바로 노찬성을 떠올렸다. 드라마 작가는 이 소설의 노찬성에서 구찬성이라는 이름을 생각했던 걸까. 소설 속에서도 노찬성이 "그래서 결국 찬성한다는 거야, 반대한다는 거야?"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네가 네 얼굴을 본 시간보다 내가 네 얼굴을 본 시간이 길어.... 알고 있니?'

 에반의 젖은 속눈썹이 미세하게 파들거렸다. 찬성이 에반의 입매, 수엽, 콧방울, 눈썹 하나하나를 ㄹ공들여 바라봤다. 그러자 그 위로 살아, 무척, 버티는, 고통 같은 말들이 어지럽게 포개졌다.

-있잖아, 에반. 나는 늘 궁금했어. 죽는 게 나을 정도로 아픈 건 도대체 얼마나 아픈 걸까?

    -<노찬성과 에반> 중


<건너편> - 노량진에서 수험생 시절에 만난 오래된 연인 이수와 도화는 함께 살고 있다. 재수 끝에 도화는 경찰공무원이 되었지만 이수는 육 년 동안 노량진에서 수험생으로 더 보냈다. 사회구성원이 된 도화와 달리 아직 시민이 아닌 것 같은 기분에 드는 이수는 부동산 컨설팅회사에 들어갔다가 다시 공무원 시험에 보기 위해 도화 몰래 그만 둔다. 이수가 도화 모르게 한 건 그뿐이 아니다. 전세 보증금도 몰래 가져갔다. 이별 통보를 하려고 했던 도화는 나중에 그런 사실들을 알게 된다.


-나는 네가 돈이 없어서, 공무원이 못 돼서, 전세금을 빼가서 너랑 헤어지려는 게 아니야.

-........

-그냥 내 안에 있던 어떤 게 사라졌어. 그리고 그걸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아.

    -<건너편> 중


<침묵의 미래> - 세계에서 사라져가는 언어를 보존하고 연구한다는 취지로 설립된 소수언어박물관에는 천여 명의 화자가 천 여 개의 언어를 지키며 살아간다. 각 전시실에는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언어를 가진 화자들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간단한 말이나 노래를 부르는 방식으로. 아무와도 나눌 수 없는 모국어는 그에 깃든 감정마저도 잠재운다. 오직 하나뿐인 모국어를 품은 채 죽어간 몸에서 빠져나온 언어의 '말에서 빠져나온 숨결과 기운들로 이뤄진 영'은 자신의 마지막 화자를 떠나며 전생을 굽어보며 죽음 이후의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나는 복잡한 문법 안에 담긴 단순한 사랑, 단수이자 복수, 시원이자 결말, 거의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노래다. 하루치 목숨으로 태어나 잠시 동안 전생을 굽어보는 말이다. 내 몸은 점점 붇고 이름 또한 길어져, 긴 시간이 흐른 뒤 누구도 한 번도 부를 수 없는 무엇이 됐다. 그렇지만 이제 나는 이 세계를 돌아가게 하는 동력, 쓸모 있는 죽음, 단지 그뿐인 채로 사라진다.

     -<침묵의 미래> 중 -


<풍경의 쓸모> -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던 어릴 적 기억이 있는 남자 정우. 어려서는 아버지가 새로운 여자를 따라 집을 떠나서 시장에서 장사하는 어머니와 살았고 자라서는 대학에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며 시간강사를 하고 있다. 강의를 하러 다니는 길에서 마주치는 풍경은 현실적 시간으로 가치 전환되고, 자신도 풍경의 일부처럼 여겨질 즈음 우연히 곽교수의 차를 얻어탄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몰랐으니 쾌적한 차에서 내다본 바깥풍경도 '그럭저럭 견딜 만한 삶의 배경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사건에 발을 내딛는 시작점이 되었으니.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던 어린 시절에는 아무도 몰랐을 풍경의 쓸모.


 강의를 마치고 돌아올 때 종종 버스 창문에 얼비친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나왔다.

            -<풍경의 쓸모> 중-


<가리는 손> - 대학을 다니다 공부를 하기 위해 한국에 왔던 동남아계 남자와 사랑에 빠져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해 재이를 낳았다. 사랑은 식고 남자는 떠나고 재이만 남았다. 어느 날 팔 분 이십 초짜리 동영상이 인터넷에 퍼진다. 십대 아이들 네 명이 폐지 실린 유모차를 끄는 노인을 조롱하고 폭행했고 그 결과 노인이 사망에 이른 영상이었다. 그곳에 손으로 입을 가린 재이가 있었다. 영상 구석에서 인형뽑기를 하다 폭행을 지켜보던 재이는 노인이 쓰러진 뒤 잠시 자리를 피한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노인은 내버려 두고 인형만 챙겨 간다. 재이의 생일, 엄마는 무연고자 장례를 치를 할아버지에게 가보자고 한다. 그리고 '틀딱'이라는 소리와 함께 웃는 재이의 표정이 동영상 속 가리는 손 아래 숨어있던 표정과 비슷하다고 느낀다.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재이가 가린 진실은 무엇일까.


 불현듯 저 손, 동영상에 나온 손, 뼈마디가 굵어진 손으로 재이가 황급히 가린 게 비명이 아니라 웃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말 그렇다면 그동안 내가 재이에게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윽고 눈뜬 아이가 맑은 눈망울로 나를 바라본다. 그러곤 가슴팍을 크게 부풀려 숨을 모은 뒤 초를 향해 훅 입김을 분다. 초가 꺼지자 주위가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그 어둠 소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재이 얼굴을 찾으려 나는 꼼짝 않는다.

    -<가리는 손> 중-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 제자를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들었다가 제자와 함께 죽은 남편을 잊지 못하는 명지는 피부 발진에 시달린다. 스트레스가 주원인인 '장미색 비강진'이라는 이름의 병명. 명지는 생전 남편이 했던 것처럼 시리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으로 부재의 공간을 견딘다. 영국 에든버러에 갔다가 돌아온 날, 명지는 죽은 제자의 누나가 보낸 편지를 받는다. '겁이 많은 지용이가 마지막에 움켜쥔 게 차가운 물이 아니라 ㅣ권도경 선생님 손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좀 놓여요. 이런 말씀드리다니 너무 이기적이지요? 평생 감사드리는 건 당연한 일이고, 평생 궁금해하며 살겠습니다. 그때 권도경 선생님이 우리 지용이의 손을 잡아주신 마음에 대해 그 생각을 하면 그냥 눈물이 날 뿐, 저는 그게 뭔지 아직 잘 모르겠거든요.'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읽고서 명지는 남편이 뛰어든 건 죽음이 아니라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시리에게 '고통에 의미가 있느냐'고 물었다. 시리는 곤란한 질문을 받으면 늘 그러듯 '제가 잘 이해한 건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당신도 영혼이 있나요?"라고 했을 땐, '정말 좋은 질문'이라고, "그런데 전에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죠?"하고 딴청을 부렸다. 자꾸 매끄럽게 도망가는 모양이 못마땅해 그즈음 내가 가장 중요하게 붙든 문제를 던졌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시리가 되물었다.

-어디로 가는 경로 말씀이세요?

-.............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

-죄송해요. 잘 못 알아들었어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중 -




 소설을 다 읽고 시리를 비롯해 다른 어시스턴트와 대화를 시도해봤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의 시리와는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행복과 슬픔, 삶에 대한 질문에 대해 '저도 행복해요' '산책을 해보세요.' '이해할 수 없는 질문'거나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하거나 검색 결과를 보여준다.

 소통이 아닌 입력된 데이터에서 대답을 추출하는 시리와의 대화는 대화라고 할 수 없었지만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단정한 대답을 들으면 헛웃음과 함께 안도감이 느껴진다. 함부로 재단하거나 예측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침이 고인다> <달려라 아비> <두근두근 내 인생>을 먼저 읽었다. <바깥은 여름>에는 작가의 이전 소설보다 더 타자의 흐느낌에 귀기울이고 고통을 들여다보기 위해 귀와 눈을 낮춘 작가의 문장들이 보인다.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작가는 <풍경의 쓸모>에서 한 문장을 빌려 여름의 빛이 미치지 못한 곳에 머무는 고립된 사람들을 기록한다.

 현실에서 벌어진 믿고 싶지 않은 일, 벗어나고 싶은 누추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 올가미에 걸려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삶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하는 건 다른 무엇도 아닌 고립감이다. 그런 사람들을 잊지 않고 기록하는 작가의 시선은 날카로운 동시에 침착하고 무엇보다 따뜻하다. 온기를 품지 못했다면 바깥에 정신이 팔려 안쪽의 풍경을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름이 쏟아지는 눈부신 바깥과 달리 하얀 눈으로 흩날린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하며 들뜬 표피를 들추고 안을 들여다보는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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