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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Jul 19. 2020

진짜 있었던 일인데

할머니가 들려주셨던 여름철 이야기

 그러니까 딱 오늘같은 날, 여름인데 여름답지 않게 서늘한 바람이 불어 어깨가 시리고 팔에 소름이 돋는 날이면 할머니를 졸라 무서운 이야기를 듣곤 했다. 창문이 시원하게 뚫리지 않아 바람이 통하는 길이 부족했던 겉만 한옥인 구옥은 여름철이면 찜통처럼 더워 등에 땀띠가 돋았다. 그런 날이면 할머니는 옥상에 올라 돗자리를 펴고 누워계셨다. 하늘색 물탱크가 놓여있고 굵은 빨랫줄이 녹슨 장대 사이에 걸려있는 작은 옥상이었다. 주로 저녁을 드시고 해가 완전히 사라질 때 옥상을 오르셨지만 선선한 바람이 불어서 집안보다 바깥이 더 시원하면 낮에도 돗자리를 펴셨다. 그럴 때 할머니를 쫓아 옥상에 올라가 무서운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할머니는 옛날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지는 않았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서너가지 이야기를 번갈아가며 약간 수정해서 들려주셨던 것 같다.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자꾸 들려달라고 졸랐던 건 어쩌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할머니가 변형시켜서 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결말을 알고 있기에 무서운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안심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 들려줘서 더이상 들려줄 것이 없다고 하셨지만 내가 계속 조르면 할머니는 그럼 지난번에 했던 이야기를 또 해야겠다고 하시며 시작하셨다. 할머니는 늘 "이건 진짜 있었던 일인데."라는 말로 이야기의 서문을 열었다.


 "이건 진짜 있었던 일인데, 이 마을 저 마을로 보따리장사를 다니는 여자 두 명이 있었단다. 한 명은 포동포동 살이 쪘고 다른 한 명은 삐쩍 말랐었지."

 "할머니, 근데 무슨 장사를 했는데? 보따리에 뭘 넣어다녔는데?"

 "....... 그런건 자세히 모르고 그냥 이것저것 팔았어."

 "가게나 시장에 가면 물건이 많은데, 누가 보따리 물건을 사?"

 "아고 그러니까 여기에서 마을은 산골마을이야. 가게도 시장도 없는 그런 마을."

  나중에는 이 대목에 이르면, 할머니는 아예 산골마을로 장소를 정해놓고 이야기를 시작하시곤 했다.

 "어느날 산골로 보따리를 장사를 다니던 두 여자는 해가 저물었는데 마을을 찾지 못했어. 산을 넘어서 다른 마을로 가자니 너무 어두워서 한치 앞도 안 보이고 나무 아래 자리를 펴고 자자니 호랑이나 여우를 만날까봐 걱정이 되지 않았겠니. 마침 그때 가까운 곳에서 불빛이 보였단다. 두 사람은 정신없이 그곳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어. 그런데 문을 열어준 사람들이 좀 이상했어.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얼굴도 천으로 다 가린 거야. 하룻밤 묵어갈 수 있냐고 묻자 음식은 없어서 줄 수 없지만 잠잘 방은 있다고 했지."

 "할머니, 근데 묵어가는게 뭐야? 그리고 호랑이가 그때도 있었어?"

 할머니는 이쯤 되면 나를 무시하고 이야기를 계속하셨다.

 "하루종일 걸어다니느라 피곤했던 두 사람은 금세 곯아떨어졌어. 그런데 새벽에 무슨 소리가 들려서 삐쩍 마른 여자가 눈을 떴어. 슥슥 삭삭. 날카로운 것을 가는 소리같았어. 여자는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 소리가 나는 방을 몰래 들여다봤어. 세상에! 아까 문을 열어줬던 사람이 머리에 둘렀던 수건과 얼굴을 가린 천을 다 벗고 있었는데, 세상에 얼굴이 다 문드러져있는거야. 글쎄 그 사람이 칼을 슥슥 갈면서 '누구부잡아먹을까' 하고 있었어. 알고 보니 이곳은 사람을 잡아먹어야 병이 낫는다고 생각하는 무서운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거야."

 할머니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무서운 사람은 아마도 한센병에 걸린 사람이었을 것이다. 한센병을 공포와 혐오로 몰아넣던 시절에 만들어졌던 수많은 이야기 중 하나. 이야기의 결말은 잠에서 깨어난 삐쩍 마른 여자만 살아남았고 아무리 깨워도 잠만 자는 포동포동 살찐 여자는 잡아먹혔다는 거였다. 수차례 들어 결말을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도 할머니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다시 듣고 싶어서 계속 졸랐다. 할머니에게 영희와 순이 이야기, 하나코 이야기도 들었는데 어릴 때는 정말 무서웠다. 차별적이고 비논리적인 대목에서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때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시간이 그저 좋아서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고 싶었던 것 같다.

 

 서늘한 기운이 올라오는 돗자리에 누워 구름 낀 여름 하늘을 올려다보면 빨랫줄에 걸린 빨래들이 바람이 지나는 순간마다 흔들렸고 전깃줄에 새가 앉았다 사라졌다. 옆집에서는 혼내는 어른과 우는 아이의 소리가 들렸고 골목으로는 두부를 팔러 다니는 종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하던 순간들, 눈앞에 쌓여있는 이토록 많은 시간은 언제 흘러가나 싶어서 아득하게 펼쳐진 시간 너머를 발돋움해서 보려 했던 순간들. 고개를 돌리면 순식간에 지나가버릴 줄 모르고 빨리 다가오라고만 했던 시간들. 돗자리를 펴고 누웠던 작은 옥상도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할머니도 이제는 없다. 아주 오래된 과거가 되었다. 그래도 그때의 기억만은 여전히 흔들리며 피어난다. 여름답지 않게 서늘한 바람이 불어 어깨가 시리고 팔에 소름이 돋는 날이면 그때 들었던 이야기가 기척도 없이 이렇게 불쑥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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