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손으로 꽃받침을 하고
고등학교 때 Y가 들려준 이야기
고등학교 시절, 사나흘 이어졌던 기말고사가 끝난 날에는 야간자율학습이 없었다. 벼락치기 공부로 눈이 충혈된 아이들은 종례가 끝나자마자 쏜살같이 교실을 빠져나갔다. 새로 개봉한 영화를 보러 갈까, 여름에 입을 옷으로 티셔츠를 살까 원피스를 살까, 떡볶이랑 쫄면 먹고 만화 보러 갈까를 신나게 이야기하며 무리를 지어 교문 밖으로 흩어졌다. 그때 이도저도 하기 싫었거나 이도저도 하기에는 용돈이 부족했던 아이들 몇 명이 교실에 남았다. 나를 포함해서 다섯 명 쯤 되었는데, 우리는 주머니를 털어 학교 매점에서 과자와 음료수를 사와서 교실에 남아 놀기로 했다. 책상 네 개를 가운데로 붙여 정사각형을 만들어 그 위에 과자와 음료수를 올려두었다. 공부와 시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교실에서 퇴장시키기로 규칙을 정한 뒤 전혀 중요하지 않지만 우리 사이에서는 중요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주제들로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공부와 시험을 뺀 모든 사소한 이야기들. 빈 과자봉지가 늘어가고 수다에서 에너지가 빠져나갈 즈음, 열린 창으로 비가 들이치기 시작했다.
낮이 밤처럼 어둑하고 장마가 오래 이어지던 날이었다.
누군가 창문을 닫기 위해 일어서자 Y가 심각한 얼굴로 "그런데 있잖아. 너희 그 이야기 알아?" 라고 하며 교실에 있던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씩 훑어보았다. 누군가 "뭔데, 무서운 이야기하려고 그러지?" 라고 묻자, Y는 대답했다. "무서운 이야기는 아니고....들어볼래?"
숏컷에 얼굴이 하얗고 쌍꺼풀 없는 눈이 크고 팔다리가 길고 몸이 마른 편이었던 Y는 쾌활한 성격으로 평소 잘 웃고 실없는 농담을 잘 했고 주성치의 영화를 즐겨봤고 새로 부임하신 젊은 미술선생님을 짝사랑하고 있었으며 특이하게도 김치 꼬다리를 좋아하는 식성을 가지고 있었다. 평소에 겁이 많아 보이던 Y였으니 우리는 무서운 이야기는 아닐 거라고 짐작하며 Y 앞으로 모여들었다. Y는 콜라를 한모금 마시고 눈을 크게 뜨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었어.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이 교실에 혼자 남아 공부를 하고 있었어."
"야, 야자가 있으면 다른 애들도 있어야지. 왜 혼자 남아있냐?"
"어어, 그날은 토요일이었으니까. 경비아저씨도 이 여학생이 늘 남아서 공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순찰을 돌면서도 그러려니 했어. 여학생은 해가 져서 어둑해질 무렵까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가 문득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 고개를 들어보니 여자아이 하나가 양손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거야. 창틀에 팔꿈치를 대고 말야. 예닐곱 살 되어보이는 어린 여자아이였는데, 여학생을 보며 싱글싱글 웃고 있었어. 평소 무뚝뚝하던 여학생은 속으로는 '어린애가 왜 여기 있지?' 라는 생각을 했지만 겉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고 다시 책으로 눈길을 돌렸어. 여자아이가 보고 있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여학생은 신경쓰지 않기로 했어. 영어공부를 마친 여학생은 집에 갈 생각으로 손목시계를 쳐다봤어. 어느새 밤 10시가 넘어있었지. 여학생은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에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어. 창틀에서 턱 괴고 있던 어린 여자아이는 여전히 그곳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여학생을 쳐다보고 있었야. 여학생은 말했어. 너 누군데 아까부터 여기 있는거야? 부모님 걱정하니까 어서 집에 가. 여자아이는 말했어. 부모님은 내가 학교에 있으면 걱정 안 해. 여학생은 교실에서 나가려다 가방에 넣어두었던 빵이 생각나서 여자아이에게 물었어. 너 배 고프면 빵 먹을래? 여자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너무 배가 고파서 빵이라면 열 개도 더 먹을 수 있다고 말했어. 여학생은 가방에서 빵을 꺼내 아이에게 내밀었어. 그러자 아이는 잠깐 기다려 내가 들어갈게, 라며 턱을 괴던 양손을 움직였어. 그리고는 턱으로 이렇게 걸어오며 말했어. 언니 착하다. 언니 나랑 놀아줘."
"턱으로 이렇게 걸어오며" 이 대목을 말할 때 Y는 큰 눈을 더 크게 뜨고서 입을 활짝 벌리고 양손으로 얼굴을 꽃받침을 한채 팔꿈치로 달리듯이 다다다다 빠르게 우리 쪽을 향해왔다. Y의 꽃받침한 얼굴과 흰자가 많이 드러난 눈과 "언니 나랑 놀아줘."라며 웃는 입술이 기괴해보여서 아이들은 비명을 질렀다. 누군가는 책상을 발로 찼고 누군가는 복도로 뛰어나갔고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화를 냈다.
나는 그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물었다.
"그런데 왜 여자아이는 팔꿈치로 걸어왔는데?"
Y를 비롯한 아이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보더니 한목소리로 소리쳤다.
"몸의 아래쪽이 없어서지!"
아....그렇구나. 뒤늦게 소름이 끼쳤다. Y의 이야기는 끝이 아니었다.
"한밤중 순찰을 돌던 경비아저씨는 빈교실에 남아있는 여학생의 가방과 비에 젖어있는 책상을 보았어. 여학생은 어디에도 없었지. 지금까지도 여학생을 본 사람은 없대. 그리고 너희도 짐작했듯 어린 여자아이는 귀신이었는데, 여학생이 다니던 학교 앞에서 난 교통사고로 몸이 심하게 훼손된 채로 그자리에서 숨졌대. 아이가 숨진 날은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었고, 그 뒤부터 학교에서 양손으로 턱을 괸 여자아이를 봤다는 목격담들이 있었다는 거야. 그래서 비오는 날에는 혼자 교실에 남아있지 말라는 말이 있었는데, 오직 공부에만 관심 있었던 여학생은 그런 사실을 몰랐던거지. 무엇보다 여학생이 공부하던 교실은 4층에 있었어. 얼마나 공부에만 집중했으면 4층에서 창틀에 턱을 괴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다는 것조차 몰랐을까."
아.....이야기를 되감아 머릿속에서 다시 재생시켜보니 정말 소름이 끼쳤다.
이야기를 꺼낸 Y도 이야기를 들은 우리도 한참동안 침묵했다. 공부만 해서 소문을 듣지 못했다가 귀신을 만나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여학생,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했는데도 그 주변을 맴돌다가 떠나지 못한 여자아이에 대해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우리가 둘러앉았던 책상 위에는 빈 과자봉지와 마시다 만 캔음료가 있었다. 창을 닫은 교실은 물에 잠겨 있는 것처럼 고요했다. 우리는 혼잣말처럼 물었다.
"그 여학생은 어디로 갔을까?"
"여자아이가 데려갔겠지."
"어디로 데려갔을까?"
"........"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하던 Y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거 사실은 진짜 있었던 일이야. 산 아래 있는 여고 있지? 그 학교 정문 앞 사거리에서 몇 년 전에 큰 교통사고가 났는데 어린 여자아이가 숨진 일이 있었대. 그때부터 양손으로 턱을 괴고 창틀에서 교실을 바라보는 아이가 목격된다는 소문이 떠돌았어."
목이 잠겨 울고 있는 것처럼 들리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자아이는 왜 귀신이 되어서까지 교실로 찾아왔을까?"
"학교를 다니고 싶었나보지."
"학교가 뭐라고. 그렇게 다니고 싶었을까."
"아이는 학교를 한번도 못 가봤으니까 한이 된 거 아닐까."
"이 이야기의 교훈은 뭐야, 공부만 너무 열심히 하면 안 된다는 거야?"
"교훈은 무슨, 슬픔만 있는거지."
무서운 이야기로 한바탕 놀라고 비명 지르고 긴장을 감춘 웃음으로 시험에 대한 긴장을 풀려고 했던 Y는 점점 무거워지는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평소 하던대로 실없는 농담과 주성치 영화에서 지저분하면서도 웃긴 장면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굳어있던 아이들의 얼굴이 조금씩 풀려갔다. 하지만 덜 풀린 입가에는 경련이 일어 크게 웃을 수 없었고, 누군가 지켜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우리는 창문 쪽으로 고개를 자주 돌렸다. 창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열린 창으로 비바람이 들이친다. 잠시 컴퓨터에서 눈을 떼고 일어나 창문을 닫는다. 그시절 기말고사가 끝난 교실에서 Y 앞으로 모여들어 이야기를 듣던 아이들의 얼굴이 하나둘 떠오른다. 심각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며 교통사고를 당한 아이와 사라져버린 여학생의 안부를 걱정하던 아이들은 다들 잘 살아가고 있을까. 장마가 길게 이어지는 이런 날이면, Y와 함께 있던 교실에서 들었던 무섭고도 슬픈 이야기를 떠올리는 날도 있을까. 지금은 길에서 마주쳐도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살아가다 가끔은 함께 했던 순간을 떠올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교실을 벗어나면 한없이 자유로워질 줄 알았던 그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