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반쪽을 담은 달콤쌉싸름한 인삼껌

김애란 <침이 고인다>

by 페이지

껌을 씹는 방식이 다르듯 껌을 뱉어내는 시간도 제각각이다.

냄새와 단맛이 지속될 때까지만 씹는 사람도 있고, 씹는 동작의 반복성에 취해 턱관절이 욱신해질 때까지 씹는 사람도 있다. 내 경우에는 껌이 지닌 특유의 냄새와 단맛이 남아있을 때까지만 씹는다. 당연히 턱관절이 아프도록 씹어본 적은 없다.

소설 속에서 그녀는 깊은 밤 혼자 원룸에서 후배가 주었던 인삼껌 반쪽을 씹고 있다. 후배는 어릴 적 엄마가 자신을 버릴 때 손에 쥐어줬던 껌이라고 했었다. 10년도 훨씬 넘은 껌이라니. 그녀는 후배의 말을 믿을 수 있었던 걸까. 무엇보다 후배의 비밀을 나눌 준비가 되어있었던가.




그녀가 조심스럽게 껌 조각을 집어 든다. 그리고 포장지를 벗겨, 눅눅하게 들러붙은 은박지를 뜯어낸다. 인삼껌은 살점처럼 피로하게 늘어져 있다. 그녀는 껌을 들어 코에 갖다 대본다. 사라질 듯 말 듯한 향신료의 흔적이 한 자락, 후각 세포 안에 걸려든다. 인삼 향은 먼지 냄새처럼 그윽하고 아련하다. 그녀는 아무 망설임 없이, 껌을 입 안에 털어 넣는다. '세상에'. 그녀가 놀란 듯 중얼거린다. '아직 달다'. 그녀는 천천히 껌 조각을 씹어가며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 눕는다. 입 안 가득 달콤 쌉싸름한 인삼껌의 맛이 침과 함께 괴었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괸다. 그녀는 이불 위에 웅크린 채, 질겅질겅 껌을 씹으며 단물이 빠질 때까지, 드라마의 '전송 완료'를 기다린다. 어스름한 모니터 불빛 때문인지 쌉싸름한 인삼 맛 때문인지 껌 씹는 그녀의 표정은 울상인 듯 그렇지 않은 듯 퍽 기괴해 보인다. 아직 알람이 울리지 않고, 울릴 리 없는, 깊고 깊은 밤이다.

-<침이 고인다> 중


<침이 고인다>의 그녀는 대형학원의 국어강사이며 13평 원룸에 살고 있다. 매달 월세와 의료보험, 적립식 펀드와 적금을 부어가야 하는 생활을 위해 '열심히 얼룩말처럼 달리고, 곰처럼 춤춰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녀는 날마다 피곤하다. 학원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경제적 독립이 주는 떳떳함과 경조사에서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 외에도 '월급날이 번번이 용서를 비는 애인처럼' 돌아왔기 때문에 그 마음을 누를 수 있었다.

학원과 원룸을 오가며 나름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그녀에게 잘 모르는 대학 후배가 찾아온다. 그녀와 만난 적이 있다며 선배라고 부르는 후배는 그녀의 기억에 없다. 하룻밤 묵고 갈 수 있는지 물어온 후배에게 그녀는 망설이다 하룻밤을 허락했다. 그날 밤 밥상을 펴놓고 와인을 마시면서 그녀는 후배의 이야기를 들었다. 후배는 꿈 속에서 그녀와 함께 동아시아 어느 나라의 을씨년스러운 벌판에 서서 이국의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말했다.


꿈 이야기 후에 두 사람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자주 웃었고 '유통기한이 정해진 안전한 우정' 때문인지 여유로웠고 친절했다. 와인 한 병을 다 비우고 눈이 반쯤 감길 무렵, 후배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손바닥을 내밀었다. 후배의 손바닥에는 손때가 묻어 반질거리는 작은 나무 상자 하나가 놓여있었다.

"언니, 제가 재미있는 얘기해드릴게요."

후배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 얘기 아니니 편하게 들으라는 후배의 입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이야기는 과히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아주 어릴 적, 후배의 엄마가 도서관에 후배를 데리고 가서 껌 한 통만 손에 쥐어주고 책을 빌려오겠다며 간 뒤 도서관이 닫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는...그대로 버려졌다는 이야기.


저는 다섯 번째 껌 종이를 벗겨냈어요. 바스락 소리가 책장 넘기는 소리와 함께 사그라지고. 설탕 파우더가 입혀진 껌을 둥글게 말아 입속에 털어 넣었어요. 엄마는 없었어요. 저는 가슴이 아팠지만 목 놓아 울 수는 없었어요. 만일 제가 도서관에서 운다면 그건 아마 세상에서 제일 큰 울음이 될 테니까요. 그녀는 어느새 후배의 말을 심각하게 듣고 있었다. 엄마는 끝내 오지 않았어요. 후배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이게 마지막 껌이에요. 후배가 상자를 내밀었다. 그런 뒤 조심스럽게 상자 뚜껑을 열었다. 그녀는 홀린 듯 상체를 기울여, 상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납작한 인삼껌 하나가 반듯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정말? 후배가 이상한 듯 되물었다. 뭐가요? 아, 아니야. 머리를 맞댄 두 사람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벨벳 위에 우아하게 누워 있는 인삼껌을 한참 동안 쳐다봤다. 포장지는 눅눅했고, 빛이 바래 있었다. 아무리 인삼껌이라지만 몸에 아주 해로울 것 같아 보였다.

-<침이 고인다> 중


후배는 이야기를 마친 뒤 껌을 반으로 쪼개더니 그녀에게 건넸다. 그러지 말라는 그녀에게 후배는 괜찮다고, 그냥 껌일 뿐이라며 했다. 그녀는 후배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거짓인지, 나를 안다는 후배는 진짜 후배가 맞는지 아니면 허구인지 혼란스러웠다. 어쨌거나 후배의 이야기는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런 이유로 그녀는 껌 반쪽을 받았다. 후배의 깊고 긴 비밀을 공유하게 된 셈이다.


후배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이후로 사라진 어머니를 생각하거나, 깊이 사랑했던 사람들과 헤어져야 했을 때는 말이에요. 껌 반쪽을 강요당한 그녀가 힘없이 대꾸했다. 응. 떠나고, 떠나가며 가슴이 뻐근하게 미어졌던, 참혹한 시간들을 떠올려 볼 때면 말이에요. 응. 후배가 한없이 투명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도 입에 침이 고여요.'

-<침이 고인다> 중


후배의 가장 비밀스러운 이야기 반쪽을 나눠가진 그녀는 후배가 머무르는 것을 허용했다.

두 사람은 생활비와 살림을 분담하고 함께 떡볶이를 먹고 하루 일상을 나누고 공과금 납부에 대해 상의하고 노트북 앞에 엎드려 영화를 봤다. 그렇게 3개월이 흘러갔다. 그 사이 후배는 말이 점점 줄어들었고 둘 사이에는 일종의 습관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녀의 눈에 후배의 습관 중에서 부정적인 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변기 뚜껑을 잘 적시고 화장품을 헤프게 쓰고 드라이할 옷을 세탁기에 집어넣고 이불 위에서 첨삭을 하고 문을 세게 닫는 등. 그녀는 더 나아가 후배가 물을 조금 마시고 젓가락을 이상하게 쥐고 발가락에 투박한 옹이가 나있는 개인적인 습관이나 신체의 특징까지도 싫어졌다.

무엇보다 그녀는 후배가 자신을 따라하고 있다고 느꼈을 때 가장 견딜 수 없었다. 옷을 입는 스타일이나 말투, 노트북에 자신이 즐겨찾기를 해놓은 사이트를 돌아다니고 자신이 알려줬던 와인까지 사기 시작한 후배. 그녀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가르치는 학원 중학생들의 논술을 후배가 잘못 첨삭한 일이 도화선이 되었다. 그녀는 후배의 실수 때문에 학원에서 싫은 소리를 들어야했다. 그날은 개원 10주년이 된 학원의 사내 체육대회가 있는 날이었다. 그녀는 단체로 추는 꼭짓점 댄스를 추고 목이 터져라 응원하고 상대팀에 분노하고 이어달리기 주자로도 뛰어야했다. 지칠대로 지쳐서 집에 들어간 그녀는 원룸에 혼자 있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이미 후배의 모든 습관과 모든 특징이 모조리 싫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눈에 보이는 것마다 트집을 잡듯 후배를 다그치고 말을 끊었다. 그리고 마침내 후배에게 '이제 그만.'이라는 말과 함께 이번 달까지 여유를 갖고 생각하자고 말해버렸다.


샤워를 하며 그녀는 힘들었던 오늘 하루가 지나갔듯 후배와 지낼 불편한 날들도 곧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날의 먼지를 깨끗이 씻어냈다.

후배가 나갈 때까지만이라도 잘해주자고 결심한 그녀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후배가 덮던 이불은 가지런이 개어져있었고 후배의 가방은 보이지 않았다. 후배는 갑자기 나타났던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사라졌다.


인생의 가장 깊은 곳에 감춰진 비밀을 공유하고자 했던 후배는 어디로 갔을까.

혹시 후배는 그녀가 상상한 적 있었던 것처럼 다른 곳에 찾아가서도 오래된 인삼껌이 담긴 나무 상자를 열어 비밀을 나누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떠나고 떠나가는 아픈 시간을 또다시 겪었으니 후배는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침이 고일 것인가.


처음에 그녀는 후배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후배의 이야기에서 특유의 냄새와 단맛이 다 빠지자 더는 기대할 것이 없었다. 처음에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던 후배의 이야기는 퇴색되어버렸다. 방 한구석에 자리 잡은 후배의 가방처럼. 두 사람 사이에는 관계의 습관만이 남았고, 그녀의 마음 속에서는 자신의 노동의 대가로 얻은 원룸에서 혼자 편하게 지내고 싶은 욕망이 일어났다.


오래된 비밀을 나누려고 했던 사람을 알고 있는가. 만약 그가 자신의 오래된 비밀을 나누려고 한다면 받아들여야할까.

껌을 씹을 때 당신은 어느 쪽인가. 특유의 냄새와 단맛이 빠질 때까지만 씹는지, 동작의 반복성에 취해 턱관절이 욱신거릴 때까지 씹는 쪽인지. 만약 단물이 다 빠져도 턱관절이 욱신거릴 때까지 씹는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껌 하나를 반으로 쪼개서 건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부디 받아준다면.

어렸을 때 만화책이 들어있는 껌을 좋아했다. 껌과 같은 크기의 종이에 만화와 글씨가 다 들어가 있었는데 내용이 꽤나 재미있었다. 오직 껌 속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껌을 산 적도 많다. 껌종이를 벗기는 것보다 만화를 먼저 보았다. 그리고 작은 종이에 담긴 짧은 만화가 끝나면 껌을 하나 꺼내 씹었다. 껌 한 통에 담긴 만화는 겹칠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새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면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며 껌을 씹었다. 단물이 빠질 때까지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불고기 쌈을 씹으며 '미어지는' 가슴을 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