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러드를 씹지 않고 삼켜버린 순간

백영옥 <아주 보통의 연애>

by 페이지


씹는 소리. 자신의 음식 씹는 소리가 너무 신경쓰여서 불안에 이를 정도라면, 그건 아마 상대에게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소설 속 김한아는 자신의 오이 씹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고 생각했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이정우가 반지 영수증 이야기를 꺼냈던 순간, 오이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김한아는 반지 영수증을 찢어서 버렸다. 그리고 그 사실을 들킬까 두려운 나머지 마음의 소리도 말의 소리도 아닌, 오이 씹는 소리를 경계하며 입안에 있던 것들을 씹지도 않고 삼켜버렸다. 비밀이 새어나가느니 차라리 숨 쉬지 않는 것을 택하기라도 한 것처럼.




"저번에 잃어버려다는 영수증 말이에요. 사실 그게 반지 영수증인데 꼭 찾아야 되거든요. 뭐라고 얘기해야 되나. 그게 말이죠..."

그는 거북한 얘길 꺼낼 것처럼 뜸을 들이기 시작했다. 순간 나는 입안의 오이를 씹지 않은 채 물고 있었다. 꼭 토막 난 오이비누를 입안에 물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정우의 입에서 '반지'얘기가 나온 순간부터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 오이를 씹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컸단 생각이 들었다. 이정우도 그 소릴 들었을 것이다. 갑자기 샐러드를 소리내 씹는다는 게 창피했다. 나는 그것을 알약처럼 씹지 않고 삼켜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숨이 안 쉬어졌다. 입을 벌린 채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홍합을 든 이정우가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상하게도 그의 얼굴 대신 이 남자의 오래된 영수증이 떠올랐다. 만 이천팔백 원짜리 택시 영수증, 십일만삼천삼백원짜리 책 영수증, 그리고 삼천칠백원이 찍힌 수십 장의 커피 영수증들이. 눈물이 흘렀다. 아마도 숫자 0을 닮은 눈물방울이었을 것이다. 어떤 것으로도 나누어지지 않고, 모든 것을 무위로 만드는 0.

-<아주 보통의 연애> 중


장소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김한아는 벨기에식 홍합요리를 먹는 이정우와 마주 앉아 샐러드를 먹고 있던 중이었다. 평소 짝사랑하던 사람과의 저녁식사였으니 그녀는 행복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정우가 반지 이야기를 꺼냈다. 순간 그녀는 자신이 내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그냥 씹지 않고 삼켜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쓰러진다. 음식을 씹지 않고 삼켰으니 식도가 막혔을 것이고 호흡이 곤란해졌을 것이다. 만약 이정우가 반지에 대한 이야기만 꺼내지 않았다면 저녁식사를 훌륭하게 마무리되었을 텐데.

이정우가 저녁을 사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반지! 반지 영수증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영수증은 찾을 수 없었다. 김한아의 손에서 이미 찢겨 버려졌으니까.


김한아는 잡지사 관리팀에서 일하는 일명 영수증 처리반이다. 하나가 아니라 한아. 하지만 이정우는 늘 '하나씨' 라고 부르고'하나씨'로 시작되는 메모를 남겼다.

그녀는 패션팀 수석인 이정우를 짝사랑하는 중이며 그 방식은 명료하면서도 비밀스럽다.

첫째 이정우가 영수증 처리반에 넘긴 영수증을 따로 복사해서 모은다.

둘째 영수증의 복사본을 보며 이정우가 갔던 장소에 찾아간다. 그렇게 김한아는 이정우가 봤던 영화나 책을 읽고 그가 마셨던 커피를 마시고 그가 갔던 식당에서 같은 음식을 먹는다. 그녀는 그렇게 모은 영수증을 일기장에 붙여왔다. 일기장은 어느새 서른두 권이 되었다.


누가 보더라도 스토커의 애정방식과 비슷하다. 몰래 이정의 영수증을 모아서 복사하고, 영수증의 흔적을 따라다니면서 자신은 그와 모든 것을 함께 하고 있다는 착각.

어쩌면 집착에 가까운 김한아의 사랑은 이정우를 향한 짝사랑이라기보다는, 이정우의 영수증을 향한 짝사랑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영수증에 더욱 집착한다.

사실 김한아의 집착은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 늘 엄마를 붙잡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 미리 포기했던 여섯 살때부터였을 것이다. 스무 살에 미혼모가 되어 대필작가로 살아가면서 돈을 버느라 바빴던 엄마를 두었던 김한아는 어릴 때부터 늘 혼자였다. 놀아줄 시간도 밥을 해서 먹일 시간도 없었던 엄마는 직장 근처 맥도널드에서 늘 빅맥과 밀크셰이크를 사 왔다. 어린 한아는 늘 배가 고팠다. 배가 터지도록 먹어도 늘 배가 고팠던 한아는 뚱뚱했다. 그럼에도 늘 허기를 느꼈다.


나는 늘 배가 고팠다. 상황은 점점 심각해져서 나중엔 터진 종이봉투까지 씹어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이 부족해서였는지는 모르겠다. 엄마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단지 하루 종일 빅맥을 먹을 수 있다면 홍금보 같은 뚱보가 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내게 맥도널드는 타도해야 할 미국문화의 쓰레기가 아니었다. 다정한 고향의 맛. 맥도널드가 없었다면 헤쳐나가기 힘들었을 외로운 여섯 살 인생이었다. 그 인생 속엔 달콤한 밀크셰이크와 케첩이 흐르는 빅맥, 고소한 프렌치프라이가 늘 함께했다. 소아비만이라는 당연한 옵션까지. 나는 뚱뚱하고 굶주린 맥도널드 소녀였다.

-<아주 보통의 연애> 중


영수증 처리반에서 일을 하면서 김한아는 회사 사람들의 근황이라든지 성격, 취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영수증은 단순한 소비의 흔적이 아니라 각자의 이야기였다. 그녀에게 영수증을 처리하는 시간은 일종의 명상과도 같았다. 어릴 때부터 철없는 엄마가 내뱉는 힘든 어른의 마음을 늘 들어야 했지만 자신은 정작 마음을 표현할 기회를 놓쳐버린 김한아는 그런 복잡한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육하원칙에 의한 선명한 일상'처럼 단순하고 명확한 영수증의 세계에서 지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영수증의 세계가 그녀를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영수증 안엔 대대적인 자기반성의 시간들이 밀봉되어 있다. 그러니까 '영수증 따위'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술 먹은 다음날, 화장실 변기에 쏟아놓은 끈적한 토사물처럼 영수증은 우리가 토해낸 일상을 투명하게 반영한다. 몇 개의 숫자, 몇 개의 단어로.

-<아주 보통의 연애> 중



어쩌면 이정우의 영수증을 짝사랑하는 김한아는 어느 날 'Tiffany&Co'라는 브랜드명이 적힌 반지 영수증을 발견한다. '스윗 달링'이라는 상품명 앞에 1580000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이정우가 누군가에게 프로포즈를 하려다가 실패한 반지였다. 하지만 실패한 반지인 줄 몰랐던 김한아는 이정우의 결혼을 방해하기라도 하듯 반지 영수증을 찢어버렸다.

그 뒤로 이정우는 끈질기게 김한아를 따라다니며 영수증을 찾아봐달라고 했다.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사겠다고 한 것도 영수증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샐러드를 씹지 않고 그냥 삼켰던 김한아는 다행히 이정우의 응급처치로 살아났고 병원 응급실에서 깨어났다. 링거를 맞는 세 시간 동안, 이정우는 내내 곁에 있었다. 김한아는 병원에서 나와 약국에 들러서 박카스와 머큐롬을 샀다. 박카스는 이정우에게 주었고 머큐롬은 자신의 손톱에 발랐다. (그녀는 손톱에 머큐롬을 바르는 취미가 있다)

며칠 후 '나'는 쓰레기통에서 찢어진 반지 영수증을 주워 모아서 찢어진 조각들을 하나씩 다라미로 눌러 펴서 테이프로 붙인 뒤 이정우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복사본이 아닌 진짜 영수증을 일기장에 붙였다.


2008년 7월 12일 오전 1시 35분.

박카스와 머큐롬.

미래약국.

이 영수증은 내게 역사적인 것이다.

복사하지 않은 첫 번째 영수증.

나는 영수증을 일기장에 붙였다.

-<아주 보통의 연애> 중


복사하지 않은 영수증을 일기장에 붙인 김한아의 사랑은 이제부터 바뀔까.

소설의 제목은 <아주 보통의 연애>지만, 김한아는 전혀 보통의 연애를 하고 있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들키지 않도록 늘 숨겼고 영수증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이정우의 생활을 비록 '따로'이지만 공유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 차이만 있을 뿐 그와 같은 것을 하고 있다고 자위하며 어긋난 짝사랑을 계속했다.


김한아의 사랑은 언제쯤 영수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단순하고 명확한 영수증의 세계에서 어른이 형식으로 구성된 세계로 언제쯤 넘어갈 수 있을지 그 시간을 가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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