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수화물을 포함하는 음식들은 다이어트를 생각하는 순간부터 가장 강력하게 생각나는 것들이다. 그런 음식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 다른 생각으로 빈 자리를 채우려고 해도 , 따뜻한 쌀밥과 라면과 떡볶이와 우동과 만두와 단팥빵과 크림빵이 사라진 자리는 점점 커진다. 먹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이미 내 몸은 먹지 않아야 할 것들을 먹기 위해 달려가려고 안간힘을 쓰게 된다.
소설 속 남자는 몸속에서 갈구하는 식욕을 모두 참아내며 다이어트에 성공한다. 몸 속 지방을 축적하려는 원시인의 시스템과 싸워내는 남자의 지난한 투쟁기록이자 자기 존재에 대한 증명이었던 다이어트. 그에게 다이어트가 그토록 절실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밥알은 달게 씹혀 목구멍 안으로 부드럽게 넘어갔다. 내 몸이 미칠 듯이 환호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위장이 춤추듯 꿈틀거렸으며 뱃속이 흐뭇할 만큼 따뜻해졌다. 자, 네가 그토록 원하는 탄수화물이다. 숟가락질이 점점 빨라졌다. 나는 이상한 감동으로 국밥을 퍼먹고 있었다. 굶주린 자신을 먹이는 아비의 마음을 넘어 고통받아온 몸을 구원하는 메씨야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자포자기, 그리고 자기 파괴적이며 충동적인 악의가 팔에 속도를 붙였다. 잔칫집의 초대받지 않은 식객답게 입가로 국물까지 흘리면서 나는 탐욕스러운 속도로 순식간에 국밥 그릇을 깡그리 비우고 말았다. 국물까지 마시고 그릇을 내려 놓자 마치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이 상복 여인이 다가와 말했다. 한 그릇 더 드리라요? 술을 워낙 많이 드시던데,. 아마 낯선 취객이 상가에서 소란을 피우지 않기를 바라는데서 나온 친절이었을 테지만 나는 망자의 누이를 향해 네,라고 마치 칭찬을 바라는 아이처럼 흔쾌히 대답했다. 두 그릇째의 국밥을 나는 후루룩 과장된 소리를 내며 지나치게 급히 먹기 시작했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중
장례식장. 검은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혼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그는 상에 놓인 다른 음식에는 손을 대지 않고 술만 마신다. 누군가가 그에게 밥을 계속 권한다. 거절하지 못해 그는 밥 한 숟가락을 뜬다. 6주 만에 처음으로 먹는 밥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남자는 병원의 장례식장이 아닌 입원실에서 아버지와 만나기를 고대했었다. 아버지에게 살이 빠진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끈질긴 다이어트를 통해 6주 동안 12킬로그램이나 뺐다. 하지만 그의 다이어트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아버지의 부고를 들었다. 다이어트에는 성공했지만, 날씬해진 남자를 봐줄 아버지는 이 세상에 없었다. 장례식장에 온 그는 봉인이 풀린 것처럼 밥을 먹기 시작했다.
다이어트를 할 때는 운동보다 식단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탄수화물을 절대 섭취하지 않는 선에서 단백질과 지방을 중심으로 식단을 구성하고 샐러드는 필수이다. 남자는 특별한 운동을 병행하지 않고 식단만으로도 살이 빠지는 다이어트를 선택했다.
'지방은 마음대로 먹고 탄수화물을 금지하는' 다이어트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이십여 년간 국밥집을 꾸렸던 남자의 어머니는 어이없어했다. '밥이야말로 조상 대대로 먹어온 신토불이 건강식이며, 국수는 열량이 밥의 절반이고 게다가 메밀국수는 널리 알려진 다이어트 식품'이라고 하며 남자의 다이어트를 비웃었다. 과일이나 주스, 감자도 사지 말라는 남자의 말에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럼에도 남자의 다이어트 신념은 확고했다. 날마다 체중을 기록하고 아침과 저녁에는 매일 같은 메뉴를 먹었다. 아침에는 달걀이나 두부에 야채를 먹었고, 저녁은 고기와 생선을 먹었다. 문제는 회사에서 먹는 점심이었다. 점심시간에 회사 동료들은 다이어트에 대한 각종 상식을 식사가 끝날 때까지 화제를 삼았다. 그 뒤부터 남자는 혼자 점심을 먹었다.
다이어트 사흘째부터 빈혈증세같은 어지러움과 집중력 저하가 찾아왔다.
다이어트 닷새째. 어머니는 저녁 식탁에 삼계탕을 올렸다. 삼계탕 뱃속에 찹쌀을 숨겨놓고서.
'고소한 밥 냄새와 함께 뜨거운 김을 내뿜고 있는 삼계탕'을 외면하며 남자가 참치캔과 두부로 저녁을 해결하는 동안, 어머니는 말했다. "사람이란 곡기가 들어가야 힘을 쓰는 법이야."
어머니는 남자의 식사가 끝나자마자 '얼음을 띄운 향기로운 꿀물'을 내오며 '몸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건강비결'이라고 했다.
꿀물 못지않게 달콤하기만 한 그 말 역시 맞는 말이었다. 몸은 늘 야구감독처럼 우리에게 각종 신호를 보내 생존이라는 경기를 컨트롤한다. 문제는 지방에 있어서만은 몸이 원하는 만족과 내가 원하는 건강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뇌로 말하자면 더욱더 내 편이 아니었다. 자신이 쓸 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다른 기관이 고생을 하든 말든 뱃속 내장에 포도당을 잔뜩 쌓아놓으라고 명령하는 게 뇌였다. 더 많이 쌓아놓는 데 혈안이 되어 위가 다 찬 다음에도 삼분이 지나서야 뇌는 그것을 몸에 전달한다. 꿀물을 향해 가까스로 손을 내젓는 순간에도 나는 동시에 내 몸속에서 맨발로 뛰쳐나와 꿀물 잔을 잡아당기는 누군가의 필사적인 몸부림을 느낄 수 있었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중
신입 여직원의 생일이라고 모두에게 나눠준 '달콤한 생크림으로 덮인 무스케이크 한 조각'과 콜라를 입사동기에게 주고, 햄버거 안에 들어있는 다진 고기만 먹고 빵은 버리는 식의 독한 다이어트를 지속하는데는 모두 이유가 있었다.
남자에게 아버지는 몇 년에 한번씩 보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실수'로 아이를 가졌다고 했다. 어머니가 남자를 홀로 키웠고, 가끔 만나는 아버지는 늘 미안해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아버지를 따라간 레스토랑에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 걸려있었다. 당시 남자는 뚱뚱했고 소심했기에 아버지를 똑바로 볼 수도 없었고 말을 꺼내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남자는 자꾸 그림을 쳐다보았다. 남자의 시선이 머물자 아버지는 그림 속 여자가 비너스라고 말해주었다.
비너스란다. 바다의 거품 속에서 태어나는 장면이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왜 그렇게 슬퍼졌을까. 초록색이 도는 우윳빛의 도자기인형처럼 매끄럽고 아름다운 얼굴. 가냘픈 알몸을 휘감은 채 바람에 날리고 있는 긴 금발의 머리카락과 커다랗게 열린 조개껍데기를 밟고 서 무방비해 보이는 하얀 맨발. 그리고 허공을 응시하는 눈속 깊은 곳의 그 신비스러운 슬픔 때문이었을까. 미안하다. 내 눈에 가득 고이는 눈물을 본 아버지는 긴 한숨을 내쉬며 침통하게 말했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중
남자는 아버지의 실수로 태어난 뚱뚱한 아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살아왔다. 그리고 자신의 외모 때문에 아버지가 실망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는 아버지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얼마 전 아버지의 아들로부터 아버지가 수술을 앞둔 위독한 상태라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남자는 더 늦기 전에 아버지에게 날씬해진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다이어트를 결심한다.
아버지의 수술 날짜와 회복 날짜를 감안해 기간은 다이어트 기간은 6주로 정했다. 남자는 동물적인 욕구에 집착하여 지방을 더 많이 축적하라고 요구하는 일명 '몸 속 원시인'과 싸워가며 다이어트를 계속해나간다. 그리하여 '몸이 지방합성에서 지방분해 단계로 완전히 접어든' 마지막 주. 모든 사람들의 눈에 확연하게 살이 빠진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병원에 전화를 걸어 아버지의 상태를 확인했다. 간호사는 장례식장으로 연락해보라고 했다.
장례식장. 여전히 남자는 혼자 앉아 밥과 술을 먹고 있는 중이다. 따뜻한 밥과 알싸한 술이 들어가자 그가 온힘을 다해 막았던 몸 속 원시인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오듯 식욕이 마구 일었다. 그때 앞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말을 걸어왔다.
"어? 너 셋째 아니냐?" "미국에서 언제 왔어? 갈수록 큰아버지를 닮아가는구나."
남자는 아니라고 대답하고는 사람들을 밀치고 복도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 장례식장에 처음 들어섰을 때는 보지 않았던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보기 위해서 빈소에 들어갔다.
내가 이태리 식당에서 지금까지 내가 알던 것과는 다른 세계를 보았듯이 아버지 역시 자신이 알던 것과는 다른 아들을 보았어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뚱뚱한 아이의 기억을 갖고 떠나버렸다. 비너스를 보며 나는 생각했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나를 멸시한다고. 아버지에게 천천히 절을 한 뒤 나는 고개를 돌려 입속의 밥알을 뱉었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중
독한 마음으로 실행했던 6주의 다이어트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지만 그 사이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남자는 살이 빠진 자신의 모습을 끝내 아버지에게 보여주지 못했다.
평생 아버지가 자신을 뚱뚱하고 소심한 아이로 기억할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살았던 남자에게 다이어트는 단순히 지방을 빼고 체중을 감량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자신의 존재가 '실수'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온힘을 다해 몸속 원시인과 싸운 투쟁의 기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