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되면 몸 곳곳에 살이 붙는다. 이 계절에는 두껍고 헐렁한 옷을 주로 입기 때문에 살이 붙어가는 줄 모르고 지내다가 봄이 되어 옷을 갈아입을 때 놀란다.
지난 겨울이 오기 전에 입었던 스커트의 단추가 잠기지 않거나 스키니진의 종아리부분이 혈액순환이 되지 않을 정도로 꽉 붙어서 더이상 입을 수 없게 되는 상황이 종종 찾아오니까.
걷는 것 외에는 운동을 않는 나로서는 추운 날씨가 이어지는 겨울에는 기본적으로 3킬로쯤 체중이 늘어난다. 날이 추우면 식욕은 왕성해지고 몸은 움직이기 귀찮아진다. 아랫배와 허리, 팔뚝과 허벅지에 살이 붙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마음껏 먹고 운동하지 않아도 체중이 늘지 않는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매운 라면에 계란을 풀어넣는 순간을 반복하던 즈음, 스티븐 킹의 <고도에서>를 읽었다.
이 소설은 날마다 0.5킬로그램씩 체중이 줄어드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주인공 스콧은 아내 노라가 떠난 뒤로 고양이와 단둘이 살고 있다. 어느 날부터 그는 날마다 살이 조금씩 빠지기 시작했다. 날마다 정확하게 0.5킬로그램씩 줄어들고 있었다. 몇 달 사이, 키 195센티미터에 109킬로그램이었던 체중이 96킬로그램까지 내려갔으니 굉장히 줄어든 셈이었다. 하지만 그의 체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스콧은 여전히 벨트 위로 불룩 배가 나왔고 여성형 유방이라고 부르는 축적된 지방질이 발달된 체형이었다.
외피는 그대로인데 무게가 줄어드는 현상. 더구나 그의 체중은 옷을 입고 쟀을 때와 벗고 쟀을 때의 차이가 없었다.
친한 이웃이자 전직 의사였던 밥 엘리스를 찾아간 스콧은 자신의 체중 감소에 대해 털어놓는다. 밥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비만에 해당되는 그가 가진 일부러 양쪽 주머니에 동전을 가득 넣은 무거운 외투를 입고 쟀다. 96킬로그램. 다음은 외투, 청바지, 셔츠를 벗고 사각팬티와 티셔츠, 양말만 입고 다시 쟀다. 여전히 96킬로그램. 스콧에게만 지구와 다른 중력이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무게는 외피와 관계없이 줄어들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도 그의 무게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밥은 스콧에게 이런 현상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이건 내 임상 경험을 넘어서는 일일 뿐만 아니라 인류가 경험한 적이 없는 일이야. 세상에 이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자네나 내 체중계가 정확하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지. 만약 정말 그렇다면 말이야. 스콧,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원인이 뭘까? 자네.... 뭔가 방사능 같은 걸 쬐기라도 했어? 싸구려 해충 퇴치 스프레이라도 가득 들이마셨나? 생각을 좀 해봐."
-<고도에서> 중
날마다 꾸준히 0.5킬로그램씩 체중이 줄어드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체형에 변화가 없고 무게가 빠져나가는 이유는 더욱. 체중이 줄어도 스콧은 여전히 허리 40인치를 유지하고, 매일 최소 3000칼로리를 섭취하고 있었다.
밥 엘리스는 스콧의 체중 변화에 이런 말을 한다.
"꼭 자네 주변에 중량을 반하는 힘의 장이라도 생긴 것 같아. 자네가 이리저리 들쑤시길 원치 않는 줄은 알지만 이건 완전히 새로운 현상이야. 엄청난 일이지.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하는 의미가 있을 거야."
스콧에게 생긴 '중량을 반하는 힘의 장'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던 걸까. 그 자신도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언젠가는 그의 체중이 '0'에 도달할 수도 있다는 것!
어느 초가을 처음으로 체중이 규칙적으로 줄어든다는 것을 확인한 뒤로, 스콧은 다음 해 달력 5월 3일에 '0'을 표시해두었다. 시간이 갈수록 줄어드는 속도는 빨라졌다. 그는 '0'이라는 숫자를 3월 31일로 옮겨 적었다.
그를 둘러싼 것들, 그와 닿아있거나 그가 팔을 휘둘러 가질 수 있는 공간 내에서는 모든 것들이 가벼워진다. 그가 속한 공간에서만 다른 중력이 작용하는 것처럼.
그의 무게는 점점 줄어든다. 마치 낮은 중력이 작용하는 행성에서처럼 그는 가볍게 뛰어오르고 가볍게 달린다.
'뛰어오르다'가 언젠가 '튀어오르다'로 바뀌기 전까지는 여전히 괜찮은 날들이 지속되었다.
스콧은 체중이 줄어들수록 자신이 너무 가벼워진다는 것을 실감한다. 몸은 여전히 크지만 한없이 가벼워지는.
그는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절실하게 깨닫는다. 그래서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단 한 가지라도 해놓고 싶어한다. 0이 되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가볍게 떠오르는 것 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콧이 사는 캐슬록이라는 마을은 대대로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곳이다.
확고한 공화당 지지자들이 모여있고, 2016년 대선에서는 3대 1로 트럼프 편을 들어줬던 곳. 그런 마을에 레즈비언 커플이 들어왔다. 디어드리와 미시. 두 사람은 버려진 농가를 개조한 집에서 살며 마을에서 레스토랑을 열었다. 채식 위주의 요리를 만들어 파는 레스토랑은 정갈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였다. 마을 사람들은 레스토랑을 칭찬했다. 하지만 그들이 레즈비언 부부라는 사실을 당당히 밝힘과 동시에 마을 사람들은 발길을 돌렸다. 단풍철에 찾는 관광객만으로 레스토랑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레스토랑은 문을 닫아야 할 위기에 처해있었다.
디어드리와 미사 부부는 스콧과 가장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다.
스콧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들 부부와 거리를 두고 살았던 사실을 깨닫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이 0이 되기 전,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로 그 부부가 마을을 떠나지 않고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잘 살 수 있기를 바라면서.
스콧은 마을에서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마라톤 경기에 참가했다. 처음에는 이웃 부부와 좋은 관계를 맺으려는 의도였는데, 마라톤의 결과는 마을 내에서 부부의 위치와 동성 커플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놓았다. 마을사람들은 부부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에 가기 시작했다.
체중이 줄어드는 속도가 급속하게 빨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 스콧은 친한 이웃인 밥 엘리스, 마이라 엘리스 부부와 디어드리 도널드슨, 미사 도널드슨 부부를 처음으로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 낯설어하던 이웃들은 스콧이 준비한 치즈, 크래커, 올리브와 함께 준비한 와인 한 잔과 함께 벽을 허물기 시작한다. 그들은 즐거운 식사를 하며 이웃이 되어간다. 즐거운 저녁식사를 마치고 난 뒤, 스콧은 저녁식사에 모인 이웃들에게 자신의 비밀을 밝힌다.
"하지만 당신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미시가 불쑥 물었다. "몸무게가 바닥나면 무슨 일이 생기는 거죠?"
"저도 몰라요."
"어떻게 살아요? 그렇게.... 그냥......"
미시는 모두를 둘러보았다. 누군가가 대신 말을 이어 주길 바랐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 그렇게 그냥 천장에 더 다닐 순 없잖아요!"
이미 그런 삶을 고려해 보았던 스콧은 다시 어깨만 들썩했다.
- <고도에서> 중
새해가 되었고 스콧의 체중은 점점 더 빨리 줄어들었다. 기온이 갑작스레 떨어지고 싸락눈이 내렸던 다음날 아침, 스콧은 우편물을 가지로 나갔다. 일명 '무중력의 상태'처럼 가벼워진 그는 습관처럼 계단 전체를 뛰어 진입로로 내려갔다. 그렇게 하면 한 번만 뛰면 멀리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멀리 갈 수 있다는 것은 좋았지만, 멈출 수 없다는 게 문제가 되었다. 스콧은 하늘로 솟구쳤다가 미끄러졌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도로를 따라 미끄러지다 겨우 멈출 수 있었다. 다행히 교통사고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 이후 스콧은 '0의 날'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절실하게 느낀다. 그래서 이웃들을 불러 마지막 식사를 한다. 이미 무중력 상태가 많이 진행된 스콧은 요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웃들이 만들어온 음식으로 포트럭 디너로 진행됐다.
그들은 채식 캐서롤과, 치즈 소스를 뿌린 감자 오그라탱을 먹고 바닥이 살짝 탔지만 몽글몽글하고 맛있는 에인절 푸드 케이크로 저녁 식사를 마무리했다. 와인도 좋았지만 대화와 웃음이 있어 더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자 스콧이 말했다.
"자백할 시간이 되었네요. 그동안 모두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제가 말한 것보다 증상이 진행되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어요."
- <고도에서> 중
스콧은 균형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며 겨우 체중계에 올라갔다. 14킬로그램이었다.
며칠 뒤 욕실 환풍기에서 불어온 바람에 몸이 좌우로 흔들리던 일요일 아침, 스콧은 1킬로그램이 되었다. 그는 디어드리에게 전화를 걸어 미리 부탁했던 일을 말했다. 디어드리는 스콧의 마지막을 보내줄 사람이었다. 그날 밤, 디어드리는 스콧에게 조끼를 입혀 버클을 채우고 이불을 덮어 공중에 몸이 뜨지 않도록 한 다음 휠체어에 태워 밖으로 나갔다. 처마가 보이지 않는 곳에 이르러 디어드리는 스콧을 조이고 있던 버클을 풀었다.
스콧은 천천히 휠체어 위로 떠올랐다. 발밑에 늘어진 이불자락이 치맛단 같아서 터무니없게도 우산 없는 메리 포핀스가 된 기분이었다. 가볍게 바람이 불었다. 그러자 스콧은 더 빠른 속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한 손으로 이불을 잡았다. 스카이라이트를 쥔 나머지 손은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디어드리의 동그란 얼굴이 점차 작아졌다. 그녀가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는 남는 손이 없어서 미처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주지 못했다. 뷰드라이브에 서 있던 다른 사람들도 그 자리에서 손을 흔들었다. 손전등이 모두 그를 향해 비추었다. 스콧의 고도가 높아질수록 손전등 불빛이 한데 모이고 있었다.
- <고도에서> 중
소설의 마지막에 스콧은 준비한 불꽃을 터뜨려 자신의 마지막을 지켜본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다. 그런 결말이 스티븐 킹의 소설처럼 보이기도, 전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영화적 장면으로 적당한 듯 보이는 동시에 따뜻한 동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캐리》나 《샤이닝》에서 흘러넘치던 선혈 대신 《고도에서》는 둥실 떠오르는 온기가 있다. 물론 스티븐 킹은 영화 《쇼생크탈출》의 원작소설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탈출>이라는 따뜻하고 감동적 이야기도 훌륭하게 쓰는 작가이다.
날마다 체중이 줄어드는 사람의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중력 자체가 다르게 작용한다는 관점에서 쓴 이야기는 새로웠다.
보수적인 마을에 고양이와 단둘이 살고 있는 스콧은 삶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덩치 큰 남자이다. 자신의 사고나 행동이 누군가에게 특별히 해가 된다고 생각하지도 못하고 살아왔다. 그런 그가 체중이 줄어들면서 주변을 돌아본다. 정당한 이유 없이 차별받는 성소수자 부부를 돌아보고 일상적 풍경의 아름다움을 돌아본다.
중력의 영향에서 벗어날수록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사회적 인식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었다. 혐오와 차별을 만들어내는 인식은 무겁다. 스콧은 가벼워짐으로써 인식의 무게도 벗어던질 수 있었다.
체중이 0에 가까워질수록 지상에서의 삶은 그에게 소중한 것이 되어간다. 동시에 남김없이 놓아야하는 운명이기도 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갓난아기로 돌아와 생을 마감하는 벤자민 버튼이 떠올랐다. 어쩌면 생은 살아갈수록 0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까. 어느 순간까지는 차곡차곡 채워졌다가 정점을 찍고 나면 풍선에서 공기가 빠져나가듯 점점 줄어드는.
미련은 남지만 붙잡을 수 없이 떠나야 하는 순간을 알고 있을 때, 스콧은 허망에 빠지지 않기 위해 육체적 무게에 맞추어 생의 무게도 천천히 덜어낸다.
'얼굴을 별들에게 향한 채 고도를 오르는 스콧의 다음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0이 되어버린 무게에서 다시 시작되는 순간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0에서 그는 마침표를 찍는다.
언젠가 삶이 0을 향해 나아가며 나를 채우고 있던 것들이 속절없이 빠져나갈 때, 더 이상 나를 지탱해줄 것들이 한없이 가벼워질 때, 그리하여 지상에 내딛는 발걸음이 제대로 발자국을 찍어내지 못하고 떠오를 때가 온다면.
나는 무엇을 가장 먼저 돌아보게 될까.
"중력은 우리를 무덤으로 끌어내리는 닻이다."는 글귀를 기억하는 스콧의 '0의 날'을 떠올리고 체중계 앞에 선다. 굳이 올라가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순간이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