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해장국을 천천히

편혜영 <호텔창문>

by 페이지

생사의 순간에서 나 혼자만 살아남았다는게 죄가 될 수 있을까.

19년 전, 운오는 강에 빠졌다가 살아났다. 살아났으니 다행스러운 일이 분명한데, 그렇지가 않다. 운오는 살아났지만 사촌형이 운오 대신 빠져죽었기 때문이다. 어른이 된 운오는 오늘도 사촌형의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에 내려왔다. 그리고 뜨거운 해장국을 아주 천천히 먹는다. 제사에 가는 시간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

나는 살고, 사촌형은 죽었다. 그리고 나는 평생 죄의식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그 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추위에 약해졌다. 조금만 추워지면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일반적으로도 추위는 더위보다 위험했다. 사망 확률이 훨씬 높았다. 기차에서 내리며 운오는 재킷을 꺼내 입었다. 여름이라고 해도 추위는 긴장과 함께 불쑥 찾아왔다.

역에서 나와서는 곧장 건너편 식당으로 갔다. 돼지 뼈를 잔뜩 넣고 끓인 해장국을 시켰다. 땀을 흘리며 뜨거운 국물을 천천히 마시고 뼈에 붙은 살을 야무지게 발라먹고 나면 긴장이 누그러졌다. 무엇보다 다 먹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점에서 운오가 매번 시키는 음식이었다.

-<호텔 창문> 중


죄의식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남자가 역 근처 식당에서 뼈다귀 해장국을 먹고 있다. 그는 사촌형의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에 내려온 운오. 운오는 자신이 늘릴 수 있는 최대한의 길이만큼 시간을 끌기 위해 천천히 뜨거운 국물을 마시고 그보다 천천히 뼈에 붙은 살점을 발라먹는다.

여름인데도 운오는 추위를 느끼며 재킷을 입었다. 사촌형의 제사가 그에게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사촌형의 제사에 갈 때마다 그는 고개를 숙여야하는 죄인이다. '사촌형의 덕으로 살아가고 있는' '아주 복도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물속에 빠진 그를 사촌형은 정말 구하려했던 걸까. 평소 사촌형은 늘 운오를 괴롭히고 겁을 주었던 사람이었는데. 하지만 운오가 물에 빠졌다가 살아났고 사촌형이 물속에 빠져 죽은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는 사촌형의 희생으로 살아난 사람이었다. 운오는 평생 죄의식을 느끼며 '혼자 살아난' 무게를 감당해야 했다.


사촌형이 죽던 날, 마을에서는 강변노래대회가 있었다. 초등학생이던 그는 사촌형 무리를 따라서 강변에 갔다. 동네에서 늘 사소한 문제를 일으켰던 사촌형과 그 무리들. 따라다니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따라다녀야 했던 무리들.

사람들은 모두 강변노래대회에 몰려있었기에 무대 뒷편에 자리한 강은 한산했다. 운오는 사촌형의 무리를 따라 조금씩 물을 밀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발이 바닥에 닿지 않은 순간을 맞이했다. 물에 빠졌던 것이다.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운오는 힘껏 팔을 내저었다. 물이 무겁게 운오를 내리눌렀다. 노랫소리가 뭉개졌고 어느 순간 아예 끊겼다. 사방이 고요해졌다. 헛되이 사지를 내젓다가 간신히 바위를 밟았다. 물에서 벗어났지만 온몸이 덜덜 떨렸다. 두려운 기분과 안도감이 교차했다. 한참 후에야 노랫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호텔창문> 중


죄를 지어도 죄의식을 갖지 않는 경우가 있다. 비슷한 맥락으로 죄를 짓지 않아도 죄의식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다. 나 때문에...로 시작되는 죄의식은 떨쳐버리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의식 속에 죄의식이 자리잡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어떤 종류의 죄의식은 시간이 갈수록 엷어지고 가벼워지지만 어떤 죄의식들은 지나온 시간과 다가올 시간의 그늘과 무게만큼 짙어지고 무거워진다. 후자에 해당하는 죄의식은 의식적으로 떼어내려 할수록 끈질기게 달라붙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다가오는 생마저 갉아먹는다.

무리 발버둥을 쳐도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죄의식 속에 갇힌 생은 이미 익사상태이다.


편혜영의 <호텔창문>에 나오는 운오는 벌써 19년 동안 자신의 생을 갉아먹고 있는 죄의식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중이다. 사촌형 덕분에 살아난 운오의 죄는 출구도 없는 곳에 그를 눕혀놓고 질식할 정도로 무겁게 눌렀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살아남은 자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생전의 사촌형은 운오에게 두려운 존재였다. 형은 학교를 자주 빠졌으며 골목에서 아이들을 때리거나 위협해서 돈을 뺐고 선생에게 대들다 발길질을 하던 사람. 자주 큰집에 맡겨지는 운오에게 '얹혀사는 주제'를 자주 상기시키며 '죽을래?'하며 윽박지르던 사람.


운오는 결코 형이 죽기를 바란 적이 없었다. 간혹 형을 두려워하고 미워했지만, 그럴 이유가 충분했지만 죽기를 바라진 않았다. 자기를 죽일 줄 알았던 형이 자신을 살린 것을 알고 운오는 구역질을 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살아난 것에 감사를 느끼기에는 아직 어렸다.

-<호텔창문> 중


그렇게 19년이 흘렀다.

올해도 운오는 다시 '사촌형 덕분에 살아남은 복 많은 죄인'으로서 형의 제사상 앞에 엎드려 절을 해야했다.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형의 옛 친구는 운오에게 '형의 희생'이 벌어진 그 날의 사건을 했다. 술을 권하는 그를 피해 운오는 식당에서 나와 역 쪽으로 걸었다. 그러다 한 때 번성했지만 지금은 유흥업소만 모여 있는 허름한 호텔에서 연기와 불길이 퍼지는 것을 목격했다. 주차해놓은 차들 때문에 소방차가 진입을 하지 못하는 사이에 불길은 계속 번지는 상황. 운오는 번지는 불길로이 겨붙을 가능성이 생겨버린 옆 호텔을 보게 된다. 운오의 눈에 비친 옆 호텔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길이 번질 위험에 빠진 상태였다.

운오는 화재가 난 호텔 5층 끝 방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옆에 서있던 사람에게 5층에 사람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옆 사람이 창문을 보려고 할 때 검은 연기가 퍼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옆 사람은 자신의 일행에게 창문에 사람이 있다고 말하고, 그 말은 퍼져나가 소방대원이 호텔로 들어가는 상황까지 이른다. 운오는 자신이 정확하게 봤는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쩐지 '사지로 소방대원을 밀어넣은 것' 같은 생각에 겁이 났다.


바람이 불어서인지 연기는 수직으로 솟구치는 게 아니라 옆으로 넓게 퍼졌다. 그 탓에 건물은 완전히 가려져서 세상으로부터 아예 지워진 것 같았다. 불길 속으로 들어간 대원도, 창가를 서성이던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운오는 연기가 삼켜버린 건물을 올려다보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사지로 대원을 밀어넣은 것 같아 겁이 났다.

-<호텔창문> 중


누군가의 희생으로 내가 살아남았다는 생각은 죄의식을 심어주기 충분하다.

<호텔창문>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우연한 상황이 맞물리면서 어쩌다가 인과관계가 형성되어버리는 장면들을 통해 죄의식에 대한 각자의 평가란을 마련해두고 있다.

본인의 의도와는 무관하지만, 그런 상황들은 옆 호텔로 불길을 번지게 할 수도 있으며 소방대원을 사지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 그리고 물 속에서 바위인 줄 알고 사촌형을 밟고 올라설 수도 있다.


19년만에 운오는 사촌형의 제사에 가지 않았다. 대신 역 근처에서 형의 옛친구와 술을 마시며 공장이 불타버린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는 사이, 기차 시간은 이미 지났고 큰집에서는 수십통의 전화와 문자가 도착해있었다.


기차 시간은 이미 지나 있었다. 서울까지는 아니더라도 가까운 곳으로 가는 막차를 알아봐야 했다. 기차를 예매하려고 휴대전화 전원을 켜자 차분한 톤의 메시지가 연이어 도착했다. 가장 최근에 도착한 메시지는 7분 전 것이었다. 네가 누구 덕에 산 줄 알아야 한다.

-<호텔창문> 중


운오는 끝내 형의 제사에 가지 않을 것이다.

제사에 가는 시간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 뼈다귀 해장국을 아주 천천히 먹었던 그는 지금부터는 다른 방식으로 형의 죽음에 대해, 오랫동안 자신을 짓눌렀던 죄의식에 대해 아주 천천히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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