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본 순간부터 무작정 끌리는 집이 있다. 오랜 고요 속에 엎드려 있다가 우리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부터 빛을 발하는 집. 평생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가 어서 문을 열고 들어오라며 손짓하는 집. 다른 사람의 눈에는 띄지 않고 순수한 꿈과 오랜 소망을 품고 찾아다녔던 사람들의 눈에만 특별한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집. 그래서 첫눈에 반해버릴 수 밖에 없는 집.
에밀과 쥘리에트에게는 숲속 빈터에 있는 작은집이 그랬다. 여섯살 때 유치원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고, 그 이후로 한번도 헤어진 적 없이, 43년 동안 결혼생활을 해온 두 사람은 그 집을 보자마자 <우리집>이라고 생각했다. 여느 사람들이 말하는 우리집과는 의미가 달랐다. 에밀과 쥘리에트가 말하는 <우리집>은 어릴때부터 꿈꿔왔으며 여생을 보내고 싶은, 다른 집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둘만의 평온을 지속할 수 있는, 그런 집이었다. 즉 다른 집으로 대체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집이었다.
평생 고등학교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가르쳤던 에밀은 정년퇴직을 하던 해에 아내 쥘리에트와 함께 노후를 조용히 보낼 만한 집을 구하고 있었다. 평생 도시에서 살았던 두 사람은 번잡스러운 관계에서 벗어나 '호젓하게' 지내고 싶어 시골을 찾았다. 그러다가 '작은 시냇가 옆 빈터에 자리잡은, 벽을 타고 올라간 등나무 때문에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집을 발견하게 된다. 집주인은 시냇물 건너편에 자리잡은 똑같은 모양의 집에는 의사가 살고 있다고 말했다. 조용함은 기본, 집세도 비싸지 않고 의사가 가까이 살고 있다는 요건까지 갖춘 집이라니.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에밀과 쥘리에트는 곧장 집을 계약했다.
숲속 작은집이 <우리집>이 된 순간, 두 사람은 '행운이 분명 함께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에밀과 쥘리에트는 평생 살아왔던 도시의 아파트보다 숲속 작은집에서 더 편안함을 느꼈다.
<우리집>으로 이사 온 후 처음 며칠 동안 우리가 무엇을 했던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너무나 하얗고 조용한 나머지 자주 걸음을 멈추고 어리둥절한 태도로 서로를 마주 보았던 숲으로 산책을 몇 번 간 것 외에는.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꿈꿔 오던 곳을 마침내 찾았던 것이다. 그런 생활이야말로 늘 갈망해 오던 것임을 우리는 바로 알 수 있었다. 그 평화로운 생활이 침해당하지만 않았다면, 장담하건대 우리는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 <오후 네 시> 중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할까. 당연하지만 기준은 각자 다르다. 나는 숲속보다는 교통이 편리하고 편의시설이 가까운 곳이 더 좋고, 오래된 집보다는 페인트칠 냄새가 나는 집이 좋다. 숲속 작은집에 대한 로망은 있지만 그럴 여건도 용기도 아직까지는 없다. 하지만 책 속에서 에밀과 쥘리에트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숲속의 행복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군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작가가 이렇게 덧붙였지. 그리 오래전도 아니지. <숨어 사려면 행복하라>고 말야. 이 말이 더 맞는 것 같아. 우리에게 더 적절해."
두 사람이 원하는 행복의 형태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상태에 가까웠다. 숲속의 집에서라면, 그정도의 소망쯤은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실제 이사를 하고 일주일 동안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생활을 유지해왔으니까 말이다. 숲속 집에서의 생활은 평온해보였다. 그 남자가 문을 두드리기 전까지는.
이사온지 일주일이 지난 어느날 오후 4시,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상의 고요에 균열을 일으킬 서막이 시작된 것이다.
남자는 자신을 베르나르댕이라고 소개한했다. 집을 계약할 때 집주인이 잠깐 언급했던 의사, 즉 이웃집 사람이었다. 에밀은 이웃집 남자가 새로운 이웃에게 인사차 들른 거라고 생각했다. 평범하게 생겼으며 말이 극도로 없는 이웃 남자를 보며 에밀은 그가 예의상 방문했으며 예의상 2시간을 참고 앉아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후6시가 되어 그가 떠났을 때, 그에 대해 가엾은 마음과 동시에 '저런 이웃은 우리를 번거롭게 하지 않을 거야'라는 안도감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웃남자는 그 다음날에도 찾아왔다.
다음 날 4시경 베르나르댕 씨는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그를 들어오게 하면서 나는 그가 자기 아내 역시 친절하게도 우리를 방문할 것이라는 말을 하러 온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의사는 전날 앉았던 안락의자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받아 든 채 말이 없었다.
"하루 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잘 지냈소."
"부인께서도 우리 집을 방문해 주실 겁니까?"
"아니요."
"부인은 잘 지내십니까?"
"그렇소."
"물론 그렇겠죠. 의사의 부인이 건강이 좋지 않을 리는 없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소."
나는 부정의 질문에 대한 응답 규칙을 떠올리며 그 <그렇지 않소>가 무슨 뜻인지 한순간 궁금했다. 나는 어리석게도 말꼬리를 잡았다.
"일본인이나 컴퓨터에게서 그런 대답을 들었다면, 부인께서 편찮으시다는 뜻으로 알아들었을 겁니다."
대답이 없었다. 일말의 자괴감이 나를 휩쌌다.
-<오후 네 시> 중
베르나르댕은 하루도 쉬지 않고 날마다 찾아왔다.
정확히 오후4시가 되면,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르나르댕은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안락의자에 앉아서 에밀의 질문에 네, 아니오 식의 대답만 하다가 정확히 6시가 되면 돌아갔다. 이웃 간의 친목을 다지기 위한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닌 듯 베르나르댕은 늘 무뚝뚝하거나 우울한 얼굴을 하고 커피 한잔을 받아들고 의자에 앉아있기만 했다. 에밀이 말을 건네거나 질문을 하기 전까지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오후 네시는 에밀과 쥘리에트에게 불안한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이웃남자에게 건네는 오후 네 시의 커피는 그들이 평생 꿈꿔왔던 <우리집>에서의 평온한 삶을 가장자리부터 적셨다. 이웃남자가 없는 시간에도 오후 네 시는 존재했다. 하루는 오직 그 시간에 붙잡혀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오후 네 시의 커피는 두 사람이 일궈낸 삶의 중심으로 번져들어왔고, 둘만의 온전한 행복에 검은 얼룩을 남겼다.
이웃남자의 방문이 싫었다면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하면 됐을 것이다. 하지만 부부는 차마 그 말을 입밖으로 내지 못하고 참았다. 오후 네시가 다가오는 것이 죽도록 싫었지만 남자에게 차가운 말을 내뱉거나 거칠게 쫓아내지 못했다. 쥘리에트가 감기에 걸려 누워있을 때조차 이웃남자는 현관문을 세게 두드려서 문을 열게 만들었으며, 끝내 오후 네 시의 커피를 마셨다.
쥘리에트가 이웃남자의 방문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았을 때, 에밀은 '이웃남자가 방문하는 두 시간은 하루에 비교하면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며, 나머지 스물두시간은 재미있게 보내고 있다'고 말한다. 쥘리에트가 "그게 침입당해도 좋은 이유야?" 라고 다시 묻자, 에밀은 '우리 생활은 꿈 같으니 불평을 늘어놓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에밀의 실제 속마음에는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었다.
교양으로 대처할 수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에밀은 불면증에 시달리며 자신도 몰랐던 '내면의 나'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된다.
예를 들어 나는 스스로가 소심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40년 동안 고등학교에서 라틴어를 가르치면서 나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하더라도 소동을 겪은 적이 없었따. 학생들은 나를 존경했다. 나는 나 자신이 선척적인 권위를 타고났다고 여겼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강한 인간이라는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따. 다만 나는 교양 있는 인간이었을 뿐이었다. 교양 있는 이들을 대할 때면 나는 여유에 넘쳤다. 그런데 뻔뻔스러운 인간을 만나기가 무섭게 내 그런 능력은 한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오후 네 시> 중
이웃남자의 지속적인 방문에 시달리던 에밀은 갑작스레 저녁초대를 하고 만다. 이웃남자에게 부인과 함께 저녁 녁 식사에 와 달라는. 다음날 저녁 8시 정각,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베르나르댕이 먼저 들어오고, 그 다음에 베르나르댕 부인이 들어왔다.
이웃집 남자는 집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선 다음 밖으로 팔을 뻗었다. 거대하고 굼뜬 물체 같은 것이 집안으로 이끌려 들어왔다. 그것은 옷을 입은 살덩어리, 아니 천으로 둘둘 말아 놓은 살덩어리였다.
다른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밖에는 의사와 함께 온 사람이 없었다. 따라서 그 혹 덩어리가 바로 베르나데트 베르나르댕이었돈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낭종이라고 해야 할 터였다. 이브는 아담의 늑골에서 나왔다. 베르나르댕 부인은 우리 고문자의 뱃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때때로 몸 안에 낭종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수술로 그것을 떼어 내는 경우가 있는데, 경우에 따라서 그 낭종이 몸무게의 두 배, 세 배까지 나가기도 한다. 팔라메드(베르나르댕의 이름)는 자신의 몸에서 떼어 낸 살덩이와 결혼한 셈이었다.
-<오후 네 시> 중
베르나르댕 부인의 얼굴에서 눈 코 입을 찾기는 어려웠다. 매끄러운 살덩이 틈 사이의 움직임으로 그 위치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에밀과 쥘리에트는 베르나르댕 부부의 결혼생활에 대해 짐작할 수 있었고, 베르나르댕이 자신들의 집에 와서 두 시간씩 머물다 가는 이유도 대충 알 수 있었다.
이웃남자는 거의 하루종일 부인을 돌보다가 오후 4시, 부인이 잠든 시간이 되면 이웃집으로 커피를 마시러 갔다.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저녁식사 이후로도 베르나르댕은 변함없이 오후 네시가 되면 현관문을 두드렸다.
에밀은 이웃 남자가 자신의 삶을 더 망쳐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문을 열어주었다.
날마다 찾아오는 이웃 때문에 불행해지고 있으며 그를 쫓아낼 용기가 없다면, 차라리 이사를 가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런 질문에 대해 에밀은 <우리집>에 대한 애정을 다시 한번 드러내며 이 집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말을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이 질문에 명확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을 보면 놀랍다. 가끔은 두려운 마음조차 든다.
자신이 지닌 기본적인 성향과 취향, 외모만으로 자신에 대해 규정하는게 과연 가능할까. 나는 지금도 자기소개가 어렵다. 구체적이고 한정된 범위의 질문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라면 더욱 그렇다. 내가 줄곧 머물렀던 환경과 전혀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사람들과 마주친다면 나는 미처 몰랐던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에밀도 자신을 잘 알지 못했다.
자신이 가장 아꼈고 자신을 가장 존경했던 옛제자 클로르가 이웃집 남자 때문에 기분이 상해서 돌아가던 날부터 에밀은 달라졌다. 잠을 못 잤고 예민해졌고 불행의 모든 원인은 베르나르댕에게 있다고 점점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웃남자가 다시 문을 두드렸을 때, 분노를 쏟아내며 남자를 쫓아내버렸다.
"썩 꺼져! 썩 꺼지지 못해. 다시는 오지 마. 또 오면 당신 머리통을 박살 내버리겠어!"
베르나르댕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에밀은 분노가 더욱 치밀었다. 에밀은 이웃남자를 쓰레기더미처럼 던져버렸다. 다음날 이웃남자는 오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오후 네 시는 이제 온전히 에밀과 쥘리에트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시간 동안 마음껏 보내지 못했다. 베르나르댕의 오후 네 시의 커피가 남긴 얼룩은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진하게 남아있었다.
며칠 뒤 베르나르댕은 자살을 시도한다.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던 에밀은 한밤중에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이웃남자에게 항의하러 찾아갔다가 연기가 자욱한 차고 안에서 그를 구해낸다. 베르나르댕이 구급차에 실려간 뒤 에밀은 쥘리에트에게 모든 사실을 알린다. 창백해진 얼굴로 '그런 무서운 일이'라고 말하는 쥘리에트에게 '이웃남자를 동정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면서 '그를 죽게 내버려 두었어야 했다'고 말한다. 그런 에밀을 쥘리에트는 겁에 질린 얼굴로 응시하다가 냉정하게 말한다.
"당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나 알아? 괴물은 바로 당신이야! 어떻게 그런 끔찍스러운 생각을 할 수 있어? 만약 당신에게 불면증이 없었다면, 당신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을 거고, 그는 죽고 말았을 거야. 당신이 금방 한 말은 살인자나 할 수 있는 말이야."
교양있는 사람으로 평생 살아왔던 라틴어 교사, 에밀은 자살을 시도한 베르나르댕을 구했다. 하지만 그를 구함으로써 자신들이 그에게서 벗어날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곧바로 후회했다. '번잡스러운 관계에서 벗어나 조용하게 살아가는 생활'에서 행복을 느끼는 에밀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이웃의 죽음을 바랐던 것이다.
에밀은 어떤 사람인가.
하루의 모든 시간이 오후 네시로 집중되려 나머지 시간을 망치는 삶에서 벗어나, 처음 <우리집>에 들어왔을 때처럼 온전한 행복을 찾고 싶은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자신의 행복을 지속하기 위해 평온한 삶에 얼룩을 남기려는 자를 차단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누군가 나의 하루 중 두 시간을 빼앗으려 하거나 이미 빼앗고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참으면서 견디거나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으로 차단하거나 분노에 일그러진 말로 쫓아낼 수도 있다다. 각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선택하는 방식은 다를 것이다. 고요한 생활을 되찾아 행복을 다시 누리려는 에밀은 어떤 행동까지 할 수 있을까.
소설의 끝을 상상하며 자신이 선택한 방식을 오래도록 물끄러미 들여다보자.그러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알게 될지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