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을 위한 샌드위치

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by 페이지

낮의 색채에 납작하게 눌러있던 악몽은 밤의 어둠을 타고 서서히 부풀어 오른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악몽은 끈질기게 몸과 마음에 달라붙는다. 여러 이유로 밤에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은 악몽에게 잡아먹히기 쉬운 대상이 된다. 악몽은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의 편안한 잠을 빼앗아가는 것으로 더욱 몸집을 불린다.

깊고 달콤한 잠을 자고 싶은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밤의 고통. 악몽의 손아귀.


잠을 빼앗긴 당신은 불 꺼진 창가에 서서 검게 펼쳐진 밤을 내려다본다.

텅 빈 도로에 갑작스레 트럭이나 오토바이가 지나간다. 그때마다 창이 작게 흔들린다. 창을 살짝 열자, 길게 뻗은 나뭇가지에 맺힌 열매가 툭툭 떨어진다. 낮에 보았을 때 붉은 빛을 담고 있던 열매는, 밤에 검다.

당신의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아오르더니 열린 창으로 빠져나가려 한다. 형체도 소리도 없어 붙잡을 수도 없다. 다시 창이 흔들릴 때 당신은 알게 된다. 보내서는 안 될 무언가를 그대로 보내버렸다는 걸. 그제야 창을 크게 열고 밖을 향해 손을 뻗어본다. 어둠에 뜬 하얀 손은 아무것도 붙잡지 못한다. 돌아오라고 소리를 쳐도 소용없다. 당신 안에서 무엇이 빠져나간 줄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여기 밤에 편히 잠들지 못하는 여자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아누슈카. 남편, 아들과 함께 러시아 모스크바의 외곽에 위치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아누슈카가 젊고 건강하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잠을 이룰 수 없다. 유전적으로 불치병을 가지고 태어난 아들의 고통이 끊임없이 들려오기 때문이다. 밤은 고통을 더 부추겨 아들의 몸을 더 앙상하게 만든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나아지지 않는 아들의 고통은 아누슈카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그녀가 아이의 방에 있는 작은 램프를 켜고 아들의 눈을 들여다본다. 불빛이 아이의 얼굴에 공들여 조각해 놓은 어두운 골짜기 안에서 두 눈이 빛나고 있다. 평소처럼 본능적으로 아이의 이마를 짙어 본다. 열은 없지만 땀에 젖어 척척하고 서늘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아이를 일으켜 앉히고는 천천히 등을 문질러 준다. 아들이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힘없이 기대자 아누슈카는 땀냄새를 맡으며 그 안에 고통이 깃들어 있음을 알아차린다.

-<방랑자들> 중-


자신의 삶을 아들의 고통과 맞바꾼 아누슈카도 일주일에 하루는 외출을 할 수 있다. 그녀의 시어머니가 일주일에 한번씩 아들을 돌봐주기 위해 집에 오기 때문이다. 자유시간이 주어진 날이면 아누슈카는 공과금을 내고 장을 보고 아이의 처방전을 받고, 가족 묘지에 꽃을 갖다 놓는 등 밀린 일들을 처리한다. 그리고 어두워지기 전, 울기 위한 장소로 이동한다. 석양을 볼 수 있는 도시의 반대편에서 실컷 울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울기 위해 그녀는 성당을 찾을 때도 있다. 그곳에서 일종의 흥정을 담은 기도도 한다. 아들 대신 자신을 아프게 해 달라거나 자신의 남편과 자신의 시어머니의 목숨과 아들의 병을 바꾸자는 등의 흥정. 반복적으로 기도를 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말 그대로 기적이 필요했다. 만약 기적이 생기지 않는다면 삶을 통째로 바꾸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키예프 역에서 버스를 갈아타던 아누슈카는 한 여인을 보게 된다. 여인은 지하도의 출구 옆에서 연속 몸을 흔들면서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쉼 없이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아누슈카는 여인의 외모 - 바지를 입은 상태에서 치마를 여러 벌 겹쳐 입고, 여러 벌의 셔츠와 블라우스, 조끼와 가죽외투를 여러 벌 겹쳐 입고 회색빛 퀼팅 코트를 걸쳤고, 천조각으로 빈틈없이 머리를 꽁꽁 싸매고 귀마개 달린 털모자를 눌러쓴-에 눈을 빼앗겼고 여인의 욕설에 귀를 빼앗겼다.


처음에 여인의 존재는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불쾌한 체취는 결코 가까이하고 싶지 않고 저주에 가까운 욕설에 오염되고 싶지 않았다. 아누슈카는 여인과 자신은 전혀 상관없는 곳에 머무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컷 울기 위해 찾아갔던 성당에서 아누슈카는 고통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거라는 사실에 절망하며 신의 나약함에 배신감을 느끼기 전까지는. 성당에서 울며 기도하던 아누슈카는 신이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절망한다.


신이 약하며 패배자라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신이 유배당했다는 것을, 세상의 쓰레기 더미에, 악취가 진동하는 심연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지 않다. 눈물은 흘려서 뭐 하겠는가, 이곳은 울 만한 장소가 아닌데. 지금 여기에 있는 신은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할 것이다. 지지도, 응원도 하지 못할 테고, 영혼을 정화시켜 주거나 구원해 주지도 않을 것이다.

-<방랑자들> 중-


집으로 돌아가던 아누슈카는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사람들의 행렬을 지켜보며 그 시간을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을 여정처럼' 느꼈다.

정해진 여정에서 한 발자국도 경로를 이탈할 수 없고 수순대로 따라가야 하는 운명. 그것은 낮의 기쁨과 밤의 잠을 모두 빼앗긴 삶이 앞으로도 영원히 펼쳐져있다 의미였다. 가족이 있는 아파트로 돌아가면 아누슈카는 변함없이 절망스러운 삶을 살아갈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역행'하고 싶은 마음에 휩싸였다. 그래서 아파트 앞까지 갔던 아누슈카는 발길을 돌려 여인이 있는 키예프역으로 돌아갔다. 여인은 여전히 옷을 여러 벌 겹쳐 입고 머리를 꽁꽁 싸매고 모자를 눌러쓴 채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아누슈카가 다가가자 여인의 욕설은 줄어들었다. 여인의 몸에 풍기는 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다가갔을 때 여인은 욕설을 멈췄다. 아누슈카는 물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죠?"

여인은 겁먹은 사람처럼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누슈카는 주택과 마당과 쓰레기더미와 광장을 지나자 여인은 지쳐서 주저앉을 때까지 쫓아갔다. 왜 쫓아오냐는 여인의 질문에 아누슈카는 다시 말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싶어요."

여인은 자신은 아무 말도 안 하니 내버려 두라고 대답하고, 일어서려고 한다. 아누슈카는 돕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가 갑자기 여인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당신을 해치려는 게 아니에요."

그 손길에 마음이 풀린 듯 여인은 배가 고프다면서 매점에서 싼 샌드위치를 사달라고 한다. 그들은 함께 샌드위치를 먹는다. 이렇게 아누슈카는 여인이 있는 세상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매점에서 아누슈카는 치즈와 토마토가 든 기다란 바게트 샌드위치를 샀다. 그러면서도 눈으로는 여인이 도망갈까 봐 줄곧 감시했다. 이 큰 샌드위치를 혼자 다 먹을 순 없는 노릇이다. 아누슈카의 손에 들린 바게트 샌드위치는 마치 겨울에 어울리는 멜로디를 연주하기 위한 피리처럼 보였다. 어둠 속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았다. 여인은 자기 몫의 샌드위치를 허겁지겁 먹어 치우고는 아무 말 없이 아누슈카의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늙은 여인이었다. 시어머니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그녀의 뺨은 이마에서부터 턱까지 대각선으로 움푹 파인 주름으로 인해 푹 꺼져 있었다. 이가 거의 다 빠져서 샌드위치를 씹는 게 힘들어 보였다. 토마토 조각이 자꾸만 빵 덩어리 안에서 삐져나왔다. 노파가 마지막 순간에 그것을 입으로 물어서 제자리에 밀어 넣었다. 노파는 이도 없이 입술만으로 샌드위치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방랑자들> 중


딱딱한 바게트 샌드위치를 힘들게 씹어먹는 늙은 여인.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아누슈카.

여인이 주소를 묻자 아누슈카는 주소를 읊는다. 집에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했지만 집주소를 잊은 것이 아니니까. 아누슈카가 주소를 읊자 여인은 바게트 샌드위치를 입안에서 오물거리며 이렇게 말한다.

"그럼 잊어버려."


잊어버리라는 말.

아누슈카가 살아오면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말이었을 것이다.

잊어버린다는 것은 기억에서 놓아준다는 것. 망각이라는 단어에 의지해 책임에서 풀려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쉽게 고통을 벗어버릴 수 있었는데 그녀는 왜 잊어버리지 못했는가.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을 잊어버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지 않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정해진 수순에 따라 다음 경로로 이동하겠는가.

망각에 의지해 책임을 풀어버리는 것은 '나 자신이 나 자신이 아닌 것으로 이동, 나의 삶이 전혀 다른 삶으로 여행'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방랑자'가 된다는 말은 내 속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도 붙잡을 수 없이 보내야 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을 읽으며 이 작품이 어느 장르에 속하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소설처럼 읽히다가 여행기로 바뀌었다가 에세이나 강연처럼 펼쳐지는 작품 속에서 나는 표제작인 <방랑자들> 에서 작품 전체의 의도를 조금이나마 읽어낼 수 있었다.

'여행'은 단순한 공간의 이동이 아닌, 지난 시간과 다가올 시간으로의 이동이며 나와 타인의 삶이 결합되었다 풀어지는 경로 속에서 이동이며 분열된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이동이기도 했다. 아누슈카의 일탈과 지하철역에 서서 끊임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욕설을 내뱉고 몸을 흔드는 늙은 여인의 모습을 통해 '방랑자들'은 '상실'을 겪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경로로 읽히기도 한다.


지하철역에서 노숙을 시작한 아누슈카는 '늘 바랐던 대로 아무런 생각도 없이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방랑자의 삶을 선택한 뒤 처음 맞이하는 단잠이었다.


고집스러운 파도가 밀려와 부딪히는 바위처럼, 이끼와 버섯으로 뒤덮인 쓰러진 나무처럼, 그녀는 꿈쩍도 안 하고 잠에 취해 버렸다. 잠에서 깨어나기 직전, 재미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귀여운 코끼리와 고양이가 그려진, 알록달록한 세면도구 주머니를 빙빙 돌리면서 놀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주머니를 던졌다. 하지만 주머니는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그녀의 두 손 사이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아누슈카는 주머니에 손을 대지 않고도 얼마든지 그것을 갖고 놀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그것을 움직여 보았다. 그것은 매우 유쾌한 체험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그러니까 어린 시절부터 맛보지 못한 놀라운 희열이었다.

-<방랑자들> 중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삶. 처음 맛보는 달콤한 꿈 속에서 아누슈카는 그런 경험을 했고 기쁨을 맛보았다. 노숙자로 살아가기 시작한 그녀는 처음 며칠 동안 자신의 의지대로 지하철을 타고 세상을 보고 승장장 벤치에 앉아 아침을 먹고 사람들이 건네는 음식을 받아먹었다.

언제까지 아누슈카는 자신의 의지로 망각을 막아내고 방랑자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

늙은 여인과 함께 돼지비계 기름을 뿌리고 생크림을 얹은 블리니를 저녁으로 먹던 날, 아누슈카는 아들과 비슷한 또래의 청년들에게 시선을 빼앗긴다. 아들과 비슷한 나이대의 청년들을 본 순간부터 이전의 삶들이 그녀의 내부에 어설프게 쌓아 올린 망각을 부수었다. 모든 순간의 기억을 되돌려주었다.


방랑자를 자처했으면서도 단 한순간도 아들을 잊은 적이 없었다. 다른 삶으로 이동하기 위해 먹었던 샌드위치는 너무 딱딱했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던 첫 저녁, 그녀는 자신의 몫으로 들고 있던 샌드위치를 먹지 않았다. 그녀의 샌드위치는 늙은 여인이 대신 먹었다. 삶을 완벽하게 이동하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누슈카는 또 다른 방랑을 선택하는 대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고통에 겨운 아들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아파트로. 밤에 잠을 빼앗기는 삶이 또다시 이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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