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중에는 사과를 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전 글에서 말했듯, 미안함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 못 하는 아이도 있지만, 정말로 미안한 마음 자체가 없는 아이도 있습니다. 진정한 사과를 하려면 먼저 자신의 언행이 잘못되었음을 인지하고, 그로 인해 피해 입은 사람의 아픔에 공감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과정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라면, 과연 사과가 가능할까요?
A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A에게 폭력은 일상이었습니다. 신체적 폭력뿐 아니라, 소위 ‘패드립’이라 불리는 상대방의 부모님을 비하하는 언어폭력에도 능했습니다. 상대가 기분 나빠하며 그만두라고 하면, A는 천진하게 되묻습니다.
“너도 우리 엄마 아빠 욕해. 괜찮아.”
그리고 그 말은 A의 진심입니다. A는 자기 부모님을 욕해도 아무렇지 않으니, 다른 아이의 부모님을 욕하는 것 역시 대수롭지 않은 장난일 뿐입니다. A의 세계에서, 그 장난을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는 것은 재미를 모르는 상대방의 문제입니다.
A의 가정은 평범했습니다. 부모님의 부부사이도 좋았고, 아이와 부모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공감 능력이 부재하게 된 것일까요? 오랜 대화 끝에 알게 된 사실은, A가 패드립이 용인되는 또래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A의 친구들은 안타깝지만 한부모 혹은 부모로 부터 나쁜 영향을 받은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부모가 없거나, 부모에게 학대받는 아이들에게 ‘부모’라는 존재는 존중의 대상이 아닙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A는 타고난 인지 능력이 높지 않아, 자신의 말이 상대방의 감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친구들이 하니까 따라 했을 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타고난 신체적 특성과 주변 환경이 더해져 다수의 사람들이 합의한 사회적 문화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자신이 다른 아이나 교사를 불편하게 해도 사과를 할 수 없습니다. A가 보기에 자신은 잘못 한게 없거든요.
B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머리는 좋지 않지만, 덩치가 크고 싸움을 잘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은 폭력을 사용하면 빠르고 쉽게 끝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았습니다. 중학생 시절, 유독 한 아이를 심하게 괴롭혔습니다. 이유는 매번 달랐습니다. 어느 날은 말투가, 어느 날은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B가 세품아에 와서 여러 과정을 거치며, 닫혀 있던 ‘생각하는 기능’이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1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문득 자신이 괴롭혔던 그 친구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B는 며칠을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어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여보세요?”
“어. 나 B야. 오랜만이다.”
“왜 전화했어?”
“어… 어… 그게… 미안하다.”
“풋. 됐다. 난 다 잊었다.”
“아니… 진짜 미안하다. 내가 잘 몰랐다.”
“괜찮다니까. 나중에 또 연락해.”
“그래… 미안하고 고맙다.”
B는 세품아에서 꽤 오랜 시간을 머물렀습니다. 귀찮아하던 생각하는 수업과 일반 학습에 꾸준히 참여했고, 교사 및 다른 친구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관계의 어려움을 이겨냈습니다. 그렇게 존중과 사랑을 주고 받자, 비로소 자신의 과거가 부끄러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존중을 받아 봐야 존중을 할 줄 압니다.
사랑을 받아 봐야 사랑을 할 줄 압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자라날 때, 비로소 진정한 사과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