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가 걷는다 (12)
커피를 좋아하지만, 어느 지역을 가서 커피 맛집 5~6곳을 연달아 가보는 건 해본 적이 없다. 카페인에 생각보다 약할뿐더러 커피만 먹으면 왠지 속이 쓰리기 때문이다. 빵이나 케이크류를 함께 파는 건 분명 커피를 더 마시게 하기 위한 카페들의 계략임에 틀림없다.
정확히 오후 5시 반까지 커피 3잔은 나에게 괜찮다. 이상하게 그 후를 넘어버리면 잠을 잘 못 잔다. 이러한 나의 특성을 고려해 부산 커피 투어를 나섰다.
* 참고: 유튜버 삥타이거의 부산 편
첫 방문지는 부산교대 근처이자 부산 지하철 교대역에서 바로 나오면 있는 모노스코프. 호랑이가 바닥에 깔려있고, 상장이 엄청 많아서 눈길이 가는 곳이다. 건물 통째가 다 모노스코프 건물이라 일반적인 카페와는 다르게 다가온다. 회사 같은 분위기, 또 모노스코프의 일원이 된다면 굶어 죽을 것 같지 않은 그런 이미지도 있다.
백수는 생각한다. 커피를 좋아해서 이런 곳에서 일을 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매일매일 최선을 다해서 커피를 만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삥타이거 유튜브 보고 왔어요, 이 한 마디를 못 한다 내가. 삥타이거 유튜버는 친화력이 엄청 좋으신데, 백수는 수줍게 핸드 드립 하나요, 라고 말하고 말았다.
1층에 있는 오디오부터 간혹 보이는 스케이트보드, 그리고 각종 커피를 만드는 도구들. 모두 절제미와 세련됨을 지니고 있었다. 백수가 넘을 수 없는 무언가의 경계. 넘으려면 옷부터 좀 힙하거나 깔끔하게 입고 왔어야 하나 싶다. 눈치 없이 스며드는 적당한 햇살이 그런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다. 햇살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해 보니, 커피 세계에서 커피 영역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반가운 존재일 터였다.
당당하게 커피를 사랑하기로 했다. 한국에 서서히 스며드는 맛있는 커피가 주는 철학과 핸드드립이 보편화되는 문화 등은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할 테니까. 거기다 자연스러운 바리스타와의 토크는 덤으로 매력적이다.
건물 3층에서 잔잔히 기다리다 보면, 자리까지 직접 친절히 커피를 들고 와주신다.
커피의 맛은 훌륭했다. 개인적으로 고소하면서도 진한 맛을 선호하는데 이 커피는 완벽했다. 어느 평일 오후, 창가 자리에 앉아 천천히 음미하며 커피를 마시는 것. 동시에 완벽한 일조량으로 비타민D를 섭취하며, 눈을 감았다 떴다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 백수의 특혜다 특혜. 이상하게 직장 다닐 때는 나의 존재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 안 하다가 백수일 때는 그렇게 나를, 나 자신을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 직장인일 때는 회사가 책임져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그런 생각을 할 시간이나 여유가 없기 때문에 나를 제쳐두는 걸까.
하루 카페 3곳은 무리겠다 싶어서, 한 곳에만 더 가보기로 했다.
두 번째 목적지는 수안커피컴퍼니 플래그십 스토어. 모노스코프에서 걸어갈 만한 거리였지만 바람이 매섭게 불어 날아갈(?) 뻔했다.
혼자 하는 커피 여행은 은근히 재미있다. 식사와 달리 1인분만 먹어도 별로 눈치 보는 일이 없고, 또 옷에 냄새도 배지 않아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카페를 들어가서부터 시작되는 모든 경험은 내 주관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내가 주문한 커피와 커피를 마시는 공간이 내 마음에 들면 끝. 커피 한 잔이 주는 소소한 행복감도 있다.
맥주와 달리 취하지도 않고, 취객이나 불편한 일을 겪지 않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커피 투어를 적극 추천한다.
수안커피.. 이곳은 공간이 주는 존재감만으로도 엄청나다. 바깥 공간과는 철저히 차단된 듯한 이곳. 이러한 공간에서 마시는 커피는 과연 어떤 맛일지. 외계인들이 마실 법한 투명 액체와 같은 신비스러움이 깃들어 있을 것만 같았다. 둥글고 높은 천장 아래 커다랗고 최첨단 원두 기계를 사용해 최상의 커피를 연구하는 바리스타는 연구원이라 불려야 할 것 같았다.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커피를 머금고 있는 듯했다.
수안커피에서 주문은 키오스크가 받는다. 나는 성질이 급한 편이라 들어가자마자 주문했지만, 카운터에서 누가 주문을 기다리는 시스템이 아니라서 천천히 ‘시음!’을 한 뒤 정할 수 있다. 이 시음은 어메이징 한데 원두를 다 먹어볼 수 있다. 추출 방식에 따라 맛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런 차이를 맛으로 느낄 수 있는 재미도 있다. 커피를 사랑한다면 여긴 곧 천국이 아닐까 싶다. 마침내 입에 착 감기는 커피를 찾아냈을 때의 성취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테이스팅 대신 경험에 의존했다. 온두라스는 신맛이 덜할 것이다, 는 추론으로 온두라스로 원두를 골랐다. 추출 방식은 핸드 드립으로 결정했다. 카톡으로 알림이 와서 받아가는 시스템. 바리스타 분들도 커피에만 집중할 수 있고 나 또한 사람보다 커피와 공간에만 집중할 수 있다. 이 넓은 공간에서 춤추고 달리기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완벽한 거리두기가 가능할 만큼 고요하고 엄숙했다. 커피를 숭배하는 종교적 공간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커피를 수웁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