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같이 읽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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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에서의 마지막 독서모임과 새로운 독서모임에 정착하게 되는 그 사이, 평소 팔로우만 하고 있었던 집 근방의 서점을 방문하게 됐다. 영화 전문 서점이란 콘셉트로 영화와 관련된 서적들이 많은 곳이었다. 서점 공간은 크지 않았지만 커피와 빵을 꽤 공들여 만드시는 게 보였고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진심이 담긴 이 공간이 마음에 들어서 그리고 영화를 좋아하지만 영화 관련 책은 많이 읽어보지 않았기에 첫 방문에 세 권이나 턱 하니 구입했다. 윤가은 감독의 에세이 『호호호』, 이창동 감독과 오정미 작가의 『버닝 각본집』 그리고 영화 잡지 『FILO』의 한 호를 샀다.
앉은자리에서 『호호호』를 국수 먹듯 호로록 읽어 내려갔다. 윤가은 감독의 영화만큼 책도 무해한 느낌이었다. 책을 읽을 때 마신 커피와 빵의 맛도 꽤 훌륭했다. 집 근처라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버스를 타고 20분만 가면 있는 거리였기에 앞으로 더 자주 와야겠다고 다짐하며 서점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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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번을 더 방문해 커피를 마시며 책을 사 읽었고 서점에서 진행되는 영화 모임에 참여해보기도 했을 때쯤 <위험하고 상냥한 시의 나라에서>라는 이름의 시인과 함께 하는 시 읽기 모임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최현우 시인이 모임지기로 참여해 시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며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배워보는 시 읽기 입문 모임이었다. 참가비도 따로 없었고 마침 시 읽기에 도전해보고 싶었기에 모집 공고를 보자마자 신청했다. 덕분에 금방 마감되었음에도 10명의 신청자 안에 들 수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첫 모임에 나갔다. 총 4회 차로 진행되었고 첫 번째 모임에서는 시집 고르는 방법이나 시 읽는 여러 방법에 대한 간단한 소개 그리고 나머지 3주 동안 읽을 시집을 고르는 시간을 가졌다. 그 해에, 2023년에 나온 시집 중에서 고르는 것이 규칙이었다. 2023년에 나온 시집의 목록을 인터넷 서점을 통해 다 같이 보는데 생각보다 그 수가 많았다. 시집을 내는 출판사의 수도 꽤 많았고 작가의 수는 그보다도 훨씬 많았다.
시의 세계를 잘 몰랐기에 나는 어떤 시인의 시가 좋을지, 어떤 시집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시인님은 시에 대해 잘 모른다면 시집 제목의 느낌이나 작가의 말을 보고 고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 알려주었고 우리는 그 방법대로 각자 마음에 드는 시집을 두 권씩 골랐다. 그렇게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시집 세 권이 추려졌다. 안미옥 시인의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와 여세실 시인의 『휴일에 하는 용서』그리고 황인찬 시인의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였다. 난 이 세 권뿐만 만아니라 최현우 시인의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와 제목이 마음에 들었서 관심이 갔던 손유미 시인의 『탕의 영혼들』도 구매했다. 시집을 한 번에 이렇게 많이 산 것은 처음이었는데 시에 대해 잘 아는 문학소년이 된 것만 같아 기분이 썩 괜찮았다.
시집을 고른 후, 각 주별로 어떤 시집을 읽을지와 시에 대한 감상을 (주로) 말할 사람 3~4명 정도를 미리 정했다. 시인님은 첫 순서로 읽을 안미옥 시인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해주셨고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를 읽으면서 가장 좋았던 시 한두 편과 감상, 좋았던 문장이나 장면 들과 그 이유를 생각해 오라고 과제를 내주었다.
그때까지 난 시집 한 권을 끝까지 읽어본 적이 었었다. 시집을 사보기도 했고 펼쳐서 읽어보기도 했지만 그때까지 시는 내게 너무 어려웠고 그 어려운 내용을 해석하려 하다 보니 흥미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를 읽을 때는 그래서 해석하고 분석하고 숨은 뜻을 찾아내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보기로 했다. 안미옥 시인의 시집은 그런 식으로 읽어도 좋은 부분이 꽤 많았다. 아마 그래서 최현우 시인이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를 첫 순서로 정한 모양이다. 첫 모임에서 나는 감상을 반드시 말해야 하는 숙제가 있지는 않았지만 혹시 모르니 나름 열심히 읽으며 준비를 해 갔다. 좋았던 시와 문장에 인덱스를 붙이고 나름의 감상까지 준비해 갔다.
이때까지는 아직 무언가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이 좀 남아있긴 했는지 시에 대한 나름의 감상과 해석을 적어놓았다. 처음 인덱스를 붙인 <론도>라는 시에 적어놓은 메모에는 그래서인지 '론도=기악곡의 한 종류, 춤곡'이라고 설명이 적혀있고 '말에도 체온이 있다면'이라는 시구에 대응하여 '시인이 말하는 온도는 미지근하거나 찬 기운일 거 같다, 어둠, 죽어가는 소리, 흙투성이, 바다, 수척한 천사 등의 단어를 보아서...'라고 수능 문제 해석하듯 적어놓았다. 지금 보면 굳이 뭘 이렇게까지... 싶긴 하지만 그때의 나에겐 이런 과정이 아직 필요했나 보다 싶어 오히려 재밌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시 외에도 <지정석>, <여름 끝물>, <엉망>, <모로코식 레몬 절임>, <만나서 시 쓰기> 등의 시에 인덱스를 붙여 갔다. 첫 번째 시 모임에서 숙제가 있던 세 명은 각자 좋았던 시와 이유를 말했고 나와 겹치는 경우도 겹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 취향을 보면서 '역시 내가 좋았던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좋았구나!'싶으면서도 '아 저 시가 저렇게 느껴질 수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모두 얻었다. 안미옥 시인의 시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처럼 따스함이 느껴진다는 얘기도 나왔고, 안미옥 시인과 친분이 있는 듯한 최현우 시인이 실제로 안미옥 시인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해주어 모두 신기해하기도 했다.
얘기를 하다 보니 내게도 말할 기회가 왔고 나는 <엉망>이란 시가 가장 좋았다고 말했다. 슬플지만 좋았던 시라고. 읽을수록 슬퍼졌지만 개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될 거 같아 좋았다 말했고 다른 사람들 역시 이 시가 가슴 아프지만 정말 좋았다고 공감해 주었다. 그리고 짧게, <만나서 시 쓰기>라는 시를 언급하며 시를 써서 전단지 나눠주듯 행인들에게 나눠주는 장면이 너무 귀여웠다고 말했다. 그러자 최현우 시인님이 '그거 정말로 시인이 해본 거예요.'라며 말해주었다. 자신이 쓴 시를 인쇄해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단지 돌리듯 주었다니...! 정말 웃기고 재밌고 귀여운 행동이다. 그 시를 받은 사람들이 부러워졌다.
무사히 첫 모임이 끝나고 두 번째 모임을 앞두고 숙제를 해올 또 다른 세 명의 사람을 뽑았다. 이번엔 나도 그중 한 명이 되었기에 열심히 읽고 준비해야지 하고 다짐했다. 두 번째 시집은 여세실 시인의 첫 시집 『휴일에 하는 용서』였다. '휴일'에 하는 '용서'라는 제목이 좋기도 하고 표지가 감각적이기도 해서 기대가 되는 시집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휴일에 하는 용서』는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와는 느낌이 아주 달랐다.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가 좀 더 감정을 건드리는 느낌의 시집이었다면 『휴일에 하는 용서』는 위트 있고 감각적인 느낌의 시집이었다.
열심히 읽고 생각하며 모임을 준비했다. 좋았던 시는 <생활>, <묘미>, <갓파의 물그릇에 물이 마르면>, <빗댈 수 없는 마음> 등등, 좋았던 문장은 더더욱 많았다. 그중에 어떤 것을 골라서 말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시집을 끝까지 읽어본 적도 없던 내가 더 많은 시, 문장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 고민하다니! 정말 크나큰 발전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 모임 당일, 첫 모임보다 조금 적은 인원의 사람들이 모였다. 각자의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기에 인원이 약간 줄어든 것이다. 이때는 '모임을 신청했으면 끝까지 책임지고 와야지!'라고 생각했지만... 다음 모임에서 바로 반성하게 된다. 참석하지 못한 인원 중에는 숙제를 해와야 했던 세 명 중 한 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말할 사람이 줄어서 오히려 다행히도 난 하고 싶은 얘기를 좀 더 편하게 다 할 수 있었다.
여러 시 중 나는 가장 좋았던 시로 <생활>과 <갓파의 물그릇에 물이 마르면> 그리고 <빗댈 수 없는 마음> 세 개나 말해버렸다. 그렇다고 세 시에 대한 감상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것은 아니고 <생활>을 메인으로 얘기했고 다른 두 시는 간단히 언급하는 정도였다.
<생활>이란 시의 제목대로 생활에 밀접한 느낌이 드는 시였다고 말하며 양칫물,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 얼룩, 빵봉지 등등 그런 느낌을 주는 단어들을 언급했다. 안미옥 시인의 <론도>를 보았을 때처럼 아직까진 분석하는 버릇이 남아있었나 보다. 또한 일상 속에서 미래 희망을 상상하고 시작하려는 느낌을 받았다는 감상을 말했다. "얼룩이 되어 번지다가/점차 자리를 잡고 무늬가 되어간다"라는 시구를 언급하며 부정적인 얼룩이 긍정적 어휘인 무늬로 변하는 그 점이 좋았다는 것도 꼭 말해야지 생각했기에 빼먹지 않고 얘기했다. 최현우 시인이 이 부분에 대해서 부가 설명을 해주기도 했다. 확실히 시에 대해 훨씬 잘 아는 '시인'이 있으니 좀 더 깊게 시에 다가갈 수 있는 느낌이었다.
<갓파의 물그릇에 물이 마르면>이란 시는 여세실 시인이 <갓파 쿠와 여름방학을>이란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고 쓴 시라는 설명이 적혀 있었기에 시를 읽고 영화를 보고 다시 시를 읽었다. 처음 시를 읽었을 때와 다르게 영화를 보고 시를 다시 읽으니 몇몇 시구에서 영화의 장면들이 그려졌다고 얘기하니, 여세실 시인이 이렇게까지 시를 읽어주는 독자가 있다는 걸 알면 정말 좋아하겠다는, 기분 좋은 칭찬을 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화까지 보고 올 줄 알았는데 그렇게까지 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빗댈 수 없는 마음>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이나 다짐이 느껴지는 시였다고 얘기했다. 이 시에서 화자의 현실이 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닌 듯한데, 그럼에도 계속해 보겠다는, 시작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져 좋았다고 말했고 이 시에서 위로를 받았다는 사람은 나뿐이 아니었다.
욕심을 내어, 하고 싶은 말을 거의 다 해서인지 두 번째 모임도 정말 즐거웠다. '이게 시를 읽는 재미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이 모임을 통해 정말로 시 입문에 성공한 것 같았다. 마지막 차례인 세 번째 시집은 황인찬 시인의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로, 이미 여러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의 최근작이었다. 최현우 시인은 황인찬 시인의 이전 시집이나 시들도 좀 찾아보길 권했다. 그렇게까지 할 자신은 없었지만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는 또 열심히, 재밌게 읽어보자 생각했다.
황인찬 시인의 이전 시집을 읽어볼 여유는 없어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만 읽었다. 당연히 난 그의 시 세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었지만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에 수많은 인덱스를 붙여가며 읽었다. <왼쪽은 창문 오른쪽은 문>, <밝은 방>, <마음>, <인화>, <살아있는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 등의 시가 좋아 인덱스를 붙였다. 아마 모임에 나갔다면 <마음>이란 시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을까 싶다. 멀리 떠나기로, 그러나 주말이 끝나기 전에 되돌아올 수 있는 거리 정도로만 간다는 시의 시작이 너무 와닿았기 때문에. 가장 와닿았던 문구는 <단속과 정복>이란 시에 있는 자신만 중소기업의 교복을 입어 부끄러웠던 기억을 말하는 장면인데 나 역시도 중학생 때 같은 생각을 했던 경험이 있기에 너무나 공감이 갔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란 시의 한 구절, "인적 없는 집에도 감은 열리고/삶도 사랑도 그렇게 근거 없이 계속되는 것입니다"라는 부분은 정말로 마음을 울렸다.
여러 생각을 하고 정리해 놓았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다. 회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회식 날짜를 어떻게든 모임 날짜와 겹치게 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딱 그날로 일정이 잡혀버렸다. 결국 마지막 모임에 가지 못한다는 문자를 보냈다. 회식을 하면서도 언제 끝나려나, 혹시 일찍 끝나면 갈 수 있으려나 신경 쓰며 시간을 보냈다. 그 모습이 동료들에게도 보였는지 회식은 정말 일찍 끝났다. 조금 늦긴 하겠지만 모임에 갈 수 있겠다 싶었는데 술 냄새를 풍기며 가는 게 모임 사람들에게 민폐일 것 같아 결국 가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아쉽다. 맥주만 마셔서 취하지도 않았고 책도 챙겼으면서. 향수라도 뿌리고 갈걸.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모임에서 또 얼마나 많은 좋은 얘기들이 오갔을지를 생각하면 어떻게든 갔어야 하는 게 맞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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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마지막 모임에는 나가지 못했지만 <위험하고 상냥한 시의 나라에서>라는 독서모임을 통해 나는 시라는 세계에 첫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시집을 끝까지 읽는 경험을 했고 시에 감동을 받고 공감을 하고 좋아하는 시가 생기기도 했다.
모임이 끝나고 나서 계속해서 꾸준히 시를 읽게 된 것까진 아니지만 관심을 두게 됐고 종종 시집을 꺼내 읽게 됐다. 지금까지 시를 읽고 필사 모임에도 나가 시를 필사하게 된 것도 어쩌면 이 모임에 참여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글을 쓰기 위해 『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 『휴일에 하는 용서』,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를 꺼내 인덱스를 붙여 놓은 페이지를 조금씩 다시 읽어 보았다. 아직은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의 취향이 같은 듯하다. 아 여전히 좋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