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기획자가 되었나
"영업을 하다가 기획으로 전향하게 된 계기가 뭐예요?"
PM 면접에서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명확한 답이 없었다.
그냥... 영업이 질렸으니까.
2019년 8월, 나는 IT 스타트업 M사의 B2B영업팀 대리로 입사했다. 당시 M사는 실시간 배송 서비스로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던 스타트업이었고, 나는 B2B 고객사들에게 2륜 배송 서비스를 영업하는 역할을 맡았다.
첫 직장이었던 M사에서의 1년은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담당 고객사인 C사의 실시간 배송 서비스 런칭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단순한 영업이 아닌 '서비스 기획'의 맛을 처음 봤다.
"고객이 오후 1시에 주문하면 당일 저녁에 받을 수 있어야 해요."
C사 담당자분이 던진 이 한 마디가 내 인생을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순히 배송비가 얼마, 배송시간이 얼마가 아니라, 고객의 니즈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서비스 플로우를 설계해야 했다.
M사에서 1년간 영업을 하면서 배운 것들이 지금 PM 업무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영업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건 고객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원하는 것'을 찾아내는 거다. E사와의 재계약 협상 때였다. 담당자는 계속 "가격을 더 낮춰달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매장별 배송 현황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관리 시스템을 원했다.
이런 경험이 지금 PM 업무에서 사용자 인터뷰를 할 때 정말 유용하다. 사용자가 말하는 표면적인 요구사항 뒤에 숨어있는 진짜 문제를 찾아내는 능력, 이게 바로 영업에서 배운 가장 큰 자산이다.
E사와의 배송 연동 API 기획 프로젝트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고객사 IT팀, 우리 개발팀, 영업팀, 운영팀... 정말 많은 사람들이 관여된 프로젝트였다. 각각의 이해관계가 다르고, 우선순위도 달랐다.
영업맨으로서 이 모든 이해관계자들을 설득하고 조율하는 과정을 경험했던 게, 지금 PM으로 일할 때 정말 큰 도움이 된다. 개발자에게는 기술적 관점에서, 영업팀에게는 비즈니스 관점에서, 고객에게는 사용자 관점에서 설명하는 법을 그때 배웠다.
영업은 결과가 명확하다. 목표 매출이 있고, 달성하거나 못하거나 둘 중 하나다. 하이 퀄리티 커피 프랜차이즈인 P사의 O2O 배송 서비스 도입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런칭 후 첫 달 주문량이 예상보다 30% 낮았다.
그때 "시장 상황이 어쩌고, 고객사 홍보가 부족하고..." 같은 핑계를 댈 수도 있었지만, 결국 내가 제안한 서비스 모델에 문제가 있었다는 걸 인정하고 개선방안을 찾았다. 이런 책임감이 지금 PM 업무에서도 프로젝트 성과에 대해 진짜 주인의식을 갖게 해준다.
1년쯤 지나니까 영업이 정말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똑같은 PPT로 똑같은 설명을 반복하는 게 너무 지루했다. 새로운 고객사를 만날 때마다 "당일배송 서비스입니다. 배송비는 얼마고, 시간은 얼마 걸립니다"를 백 번도 더 말한 것 같다.
특히 경쟁사가 늘어나면서 차별화 포인트가 점점 줄어들었다. 가격 경쟁으로 가다 보니, 내가 하는 일이 단순히 '더 싼 가격'을 제시하는 것에 그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C사의 실시간 배송 서비스 프로젝트는 달랐다. 고객의 니즈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서비스 플로우를 설계하고, 실제로 그걸 구현해서 런칭까지 하는 전 과정에 참여했다. 이때 처음으로 '기획'이라는 게 뭔지 맛을 봤다.
C사의 서비스가 성공적으로 런칭되고, 실제 고객들이 서비스를 사용하는 걸 보면서 느꼈다. "아, 나도 이런 걸 직접 만들고 싶다." 단순히 남이 만든 서비스를 파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기획하고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그때가 2020년 초, 코로나가 시작되던 시점이었다. 비대면 서비스들이 급성장하면서 IT 기획자에 대한 수요도 급증했다. 주변에서 개발자나 기획자로 이직한 친구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M사에서 마지막으로 진행한 E사 배송 연동 API 기획 프로젝트가 내게는 일종의 '기획자 체험'이었다.
고객사의 기존 시스템을 이해하고, 우리 시스템과 어떻게 연동할지 설계하고, 개발팀과 함께 API 스펙을 정의하는 과정. 영업맨이지만 사실상 기획자 역할을 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개발팀과 소통하는 법도 배웠다. 처음엔 "이거 그냥 연동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라고 물어봤다가, 개발팀장님께 30분짜리 기술 설명을 들어야 했다. 그때 깨달았다. 기획자가 되려면 최소한의 기술적 이해는 필수라는 걸.
2020년 8월, M사를 떠났다. 다음 회사는 아직 정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확실한 건 기획자로 커리어를 전환하겠다는 결심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무모한 결정이었다. 기획 경험도 부족하고, 포트폴리오도 변변치 않았다. 하지만 영업을 하면서 배운 '고객 니즈 파악 능력'과 '이해관계자 관리 능력'이 있으니까, 뭐든 할 수 있을 거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영업에서 기획으로의 전환은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 물론 쉽지 않았다. 처음 IT 대기업인 K사에 입사했을 때는 정말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매일 야근하면서 공부했다.
하지만 영업에서 배운 것들 - 고객 니즈 파악, 이해관계자 관리, 결과에 대한 책임감 - 이 모든 것들이 PM 업무의 핵심 역량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걸 깨달았다.
영업맨 시절 C사 담당자가 했던 그 말, "고객이 오후 1시에 주문하면 당일 저녁에 받을 수 있어야 해요"를 지금도 기억한다. 고객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걸 구체적인 서비스로 만들어내는 것. 그게 바로 PM의 본질이라는 걸 그때 처음 배웠다.
다음 글에서는 M사를 떠난 후 잠깐 거쳤던 T사에서의 4개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제조업이라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그리고 그 경험이 어떻게 지금의 PM 커리어에 도움이 되고 있는지.
영업에서 기획으로의 전환을 고민하고 있다면, 혹은 비슷한 커리어 고민을 하고 있다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다음 편: "제조업에서 배운 것: T사에서 4개월의 교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