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사에서 4개월의 교훈
"4개월만 다니고 그만뒀다고요? 그럼 그 경험이 지금 PM 업무에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면접관이 의아해하며 던진 질문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4개월이 내 PM 커리어에 미친 영향은 상당했다.
2020년 8월 M사를 퇴사한 후, 나는 막막했다. 기획자로 전향하겠다고 결심했지만, 당장 기획 경험도 부족하고 포트폴리오도 없었다. 그때 마침 대학 선배가 T사에서 일하고 있다며 추천해줬다.
"일단 경험이라도 쌓아보자"는 생각으로 2022년 2월, T사 B2B영업팀에 사원으로 입사했다. 솔직히 말하면 '임시방편' 같은 느낌이었다. 기획자로 갈 때까지의 과도기 정도로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4개월의 경험이 지금 S사에서 물류 PO로 일하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입사하자마자 맡게 된 프로젝트가 'H사 해외 플랜트 PJT 입찰'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이집트에 건설되는 발전소에 들어갈 전선을 공급하는 계약을 따내는 것이었다.
M사에서 다뤘던 프로젝트와는 차원이 달랐다. 계약 금액만 수십억 원 단위였고, 프로젝트 기간은 2년 이상이었다. 단순히 '물건을 파는' 게 아니라, 설계부터 제조, 운송, 설치까지 모든 과정을 책임져야 했다.
처음 BM 서류를 받아봤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영어로 된 A4 용지만 200페이지가 넘었다. 기술 사양서, 품질 요구사항, 납기 조건, 결제 조건... 하나하나가 다 복잡했다.
M사에서도 B2B 영업을 했지만, T사에서 경험한 B2B는 완전히 달랐다. 여기서는 한 번의 계약이 회사의 1년 매출을 좌우했다. 그만큼 의사결정 과정도 신중하고 복잡했다.
H사 담당자와의 첫 미팅에서 느낀 건, 이들이 원하는 건 단순히 '좋은 제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기술적 신뢰성, 납기 준수 능력, 사후 서비스까지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평가했다.
T사에서 배운 가장 큰 것 중 하나는 '공급망'의 복잡성이었다. 전선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도 수많은 협력업체가 관여했다.
구리 원자재 조달 → 절연재 생산 → 케이블 제조 → 품질 검사 → 포장 → 운송 → 설치
각 단계마다 다른 회사, 다른 시스템, 다른 기준이 존재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만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었다.
C사 해외 플랜트 프로젝트에서 이를 몸소 체험했다. 인도네시아 현지 규정에 맞는 특수 케이블을 제작해야 했는데, 원자재 조달부터 문제였다. 인도네시아 전력청의 승인을 받은 특정 규격의 구리만 사용해야 했는데, 그 구리를 조달할 수 있는 국내 업체가 단 2곳뿐이었다.
결국 납기를 맞추기 위해 해외에서 원자재를 직수입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관세, 운송, 품질 검증까지 모든 것을 새로 설계해야 했다.
스타트업에서는 "일단 해보자"가 통했지만, 제조업에서는 달랐다. 한 번의 잘못된 결정이 수십억 원의 손실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만큼 의사결정 과정도 신중하고 체계적이었다.
입찰서 하나를 작성하는데도 기술팀, 영업팀, 생산팀, 품질팀이 모두 참여했다. 각자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의견을 조율했다.
수백 명이 함께 일하고, 몇 년에 걸친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면 표준화된 프로세스가 필수였다. 누가 어떤 일을 맡아도 동일한 품질을 보장할 수 있어야 했다.
스타트업에서는 빠른 실행이 중요했다면, 제조업에서는 장기적 관점이 핵심이었다. H사 프로젝트 같은 경우, 계약부터 완료까지 3년이 걸렸다.
그 과정에서 원자재 가격 변동, 환율 변화, 현지 법규 변경 등 수많은 변수가 발생했다. 이 모든 것을 미리 예측하고 대비책을 마련하는 게 필수였다.
사실 T사를 4개월 만에 그만둔 이유는 간단했다. 여전히 기획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제조업의 체계적인 면은 좋았지만, 혁신과 변화의 속도가 내 성향과 맞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4개월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현재 S사에서 디지털 포워딩 서비스를 기획하면서, T사에서 배운 것들이 엄청난 도움이 되고 있다.
S사에서 수출입 서비스를 기획할 때, 단순히 '화물을 A에서 B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는 걸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원자재 조달부터 최종 납품까지의 전체 공급망을 고려해야 한다는 걸 T사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현재 S사의 고객사들과 미팅할 때, 그들이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 파악하는 능력도 T사에서 기른 것이다. 단순히 더 빠르고 저렴한 서비스가 아니라, 신뢰할 수 있고 투명한 프로세스를 원한다는 걸 안다.
BL 자동 발행 기능이나 적하목록 신고 자동화 같은 기능을 기획할 때, 예상되는 모든 리스크를 미리 고려하는 습관도 그때 생겼다. 한 번의 오류가 고객사의 수출입 일정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T사에서의 4개월은 내게 세 가지 핵심 PM 역량을 길러줬다.
1. 시스템적 사고 하나의 기능이나 서비스를 기획할 때, 그것이 전체 시스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는 능력
2. 리스크 관리 예상 가능한 모든 시나리오를 미리 검토하고 대비책을 마련하는 습관
3. 장기적 관점 단기적 성과에만 매몰되지 않고, 장기적 관점에서 지속가능한 솔루션을 설계하는 시각
이 세 가지가 없었다면, 지금 물류라는 복잡한 도메인에서 PM으로 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4개월만 다니고 그만둔 경험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제는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제조업에서 배운 체계적 사고와 리스크 관리 능력이 지금 내 PM 역량의 핵심이 되었다고. 특히 물류라는 전통 산업과 디지털 기술이 만나는 지점에서 일할 때, 그 경험이 얼마나 소중한 자산인지 매일 느끼고 있다고.
커리어는 직선이 아니다. 때로는 돌아가는 길이 더 빠른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각각의 경험에서 무엇을 배우고, 그걸 어떻게 다음 단계에 활용하느냐이다.
다음 편: "첫 PM 도전기: IT 대기업 K사 입사 후 첫 3개월"에서는 본격적으로 PM 커리어를 시작한 K사 초기 경험담을 들려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