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7 : 가장 기억에 남는 고해성사는?
<주제>
고해성사의 은총은 더 자주 자신을 성찰하며 나의 삶을 하느님 중심으로 이끌어줍니다. 나의 삶을 정화시키는 화해와 참회의 경험을 찾아봅시다.
고해소 안에서 짧은 고해성사를 마친 후 마음이 편해지고 감사하다고 느낀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냥 해야 할 숙제를 끝낸 느낌.
대신 정말 성사가 간절할 때에는 신부님께 만나 뵙길 청하고 시간을 내주시길 부탁드리고 그리고 비교적 오랜 시간 상담을 청한다. 고해소가 아닌 밖에서. 그날도 그랬다.
“신부님, 저 이제 복의 통로가 되는 거 그만하고 싶어요. 이제부터는 복 좀 받으며 살고 싶어요. 제가 무슨 아브라함처럼 선택받은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신부님이 틀리셨어요. 이젠 저도 나이 들고... 늙고 병들고, 고단하고 힘들어요.”
신부님께서는 내가 힘들어할 때마다 요셉피나는 복의 통로가 되어주는 사람이라고 늘 격려하며 힘을 주셨다. 힘들다고 투덜거리고 가끔 울먹일 때마다 늘 해주신 말씀은 내게 또 살아갈 힘을 주셨다. 하지만 그 날은 너무 지쳤고, 그런 위로가 더 이상 도움도 되지 않았기에 내 말한 마디 한 마디엔 가시가 돋았다.
“그럼 요셉피나는 복의 통로만 되고 복을 받은 적은 없나요?”
신부님은 늘 질문을 하신다. 이렇다 저렇다 말씀 대신 질문을 하시고, 난 또 생각하고 대답한다.
“그건, 아니구...”
“그럼 지금 요셉피나가 원하는 대로 겪고 있는 고통을 다 없애는 복을 드리고, 대신 이제껏 받으신 복을 다 가져 갈게요. 그럼 그렇게 하실 건가요?”
그건...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부님, 왜 이렇게 제게 가혹하세요? 무슨 신부님이 이렇게 극단적이신가요?”
몇십 년 동안의 신부님과의 만남은 가끔은 이렇듯 허물없는 대화도 허락해 주신다. 신부님도 웃으시고 나도 웃었다.
늘 나의 질문은 정답이 정해진 질문이었고 신부님도 이런 내 마음을 잘 알고 계셨다. 보속 대신 책 한 권을 선물해 주시기도 하고, 맛있는 식사를 사주시기도 하셨다. 내 마음이 다시 답을 찾는 것이 나의 보속이라 하셨다. 짧을 때는 몇 달에 한 번, 길 때에는 몇 년에 한 번 그렇게 신부님을 뵙는다.
처음 신부님과 오랜 시간 얘기 나눈 것은 성서공부를 막 시작했을 때였다. 납득하기 힘든 사실에 대한 질문에 더 납득하기 힘든 답을 하신 경우를 두고 신부님께 한참 불만을 토했다. 그때만 해도 패기가 넘쳤나 보다.
“하느님을 잘 믿기 위해 교리가 있는 것인데 그 교리가 걸려 하느님을 떠나게 된다며 차라리 그 교리를 버리는 것이 낫죠.”
"진짜죠 신부님? 진짜죠?”
나는 그때 나의 의심이 믿음에 대한 배반이 아니라 믿음을 더 깊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진짜, 처음 알았다. 내가 배운 아니 알고 있는 신앙은 의심하지 않고 믿는 것이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오랜 시간 그 생각은 나 자신을 괴롭혔고 마침내 폭발했던 것 같다. 그리고 비로소 자유로워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의 내 보속은 아마도 성경공부를 끝까지 무사히 끝내는 비교적 어려운 보속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자유롭고 감사한 마음으로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매 번 고해가 첫 고해 순간만큼 떨리고 설레고 두려울 수 없겠지만, 지금의 고해성사는 늘 아쉽다. 형식적인 틀 안에서 시간에 치이고 신부님도 힘드시고.... 신부님과의 상담처럼 좀 더 오랜 시간 깊은 호흡으로 각자의 신앙을 돌아보고 성장하는 그런 시간이 허락되길 바랄 뿐. 나아가 언젠가는 그 형식적인 고해성사 시간에도 나의 신앙이 자랄 때가 오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