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신앙에 대해 알아가는 길은
사람마다 제각기 다릅니다.
내가 가진 신앙의 기반을 닦기 위해
나는 어떻게 배우고 익히고 있나요?
아카데미 시상식에 앞서 봉준호 감독은 후보에 오른 감독들 모두에게 ‘길에서 어린아이를 붙잡고 감독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짧게 설명한다면 뭐라 설명할지’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고 했다. 역시 기대했던 대로 각자의 다른 멋진 답들이 나왔다. 정이삭 감독은 그의 영화 미나리처럼 ‘스토리텔러는 실제의 삶에 기반을 두어야 진정한 스토리텔러가 될 수 있다’고 답했고, 영화 맹크의 데이비드 핀처 감독은 ‘하나의 신을 찍기 위해서는 수백 가지 방법이 있지만 끝에 가서는 딱 두 개의 방법만 남는다. 맞는 방법과 틀린 방법’이라는 멋진 답을 했으며 이는 많은 감독들에게 매우 서늘하고 무서운 코멘트라고 했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 연기·촬영·녹음·편집 과정 등을 지휘하고 감독하는 총책임자’라는 사전적 의미를 답한 사람을 물론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신앙 또한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길에서 어린아이를 붙잡고 나의 신앙을 표현하는 방법은 무엇인가에 관해 짧게 설명한다면 뭐라 설명할지’ 물어본다면 아마 수백 가지 이상의 답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할 예수님의 사랑은 한 가지이지만 각자가 생각하고 따르는 예수님의 사랑법은 모두 다른 빛깔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0)는 말씀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이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표현 방식은 다 다르다. 이유가 무엇일까? 이는 아마도 예수님의 사랑을 ‘내 방식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말로는 저마다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지극히 나다운 방법으로 실천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다름은 아름다움이지만 그 다름이 온전히 예수님의 사랑의 다른 표현이 아니라 각자의 틀에서 나오는 다름이라면.... 사랑 가득하신 예수님도 ‘그건 내가 아닌데....’라고 당황해하시지 않을까 생각된다.
실제로 나는 고통을 잘 참지 못한다. 그래서 아프면 우선 진통제 먼저 찾는다. 남편은 많이 아프면서도 거의 약을 먹지 않고 며칠이 지나면 저절로 없어질 고통을 참고 인내한다. 남편은 약을 많이 먹는 나를 걱정하고, 나는 참는 남편을 의아해한다. 사소한 것에서도 우리의 성격은 명확히 드러난다. 그저 자신의 방식대로 각자의 고통을 극복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답은 없지만 남편의 방식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은 든다. 하지만 따라 할 생각 또한 없으니 사람의 생각과 행동은 어찌 보면 참 이율배반적이다. 신앙의 다름을 설명하고자 서론이 너무 길었다.
그리고 나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져 보았다. 나에게 신앙을 표현하는 방법은 어렸을 때와 지금은 확연히 달라졌다. 전에는 주로 기쁠 때 감사하는 마음이 우선했지만, 지금은 힘듦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주가 된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라는 세 복음서 말씀처럼 주님이 간절히 기도하신 ‘아버지의 뜻대로 내게 주어진 일, 하지만 실은 힘들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기꺼이 하는 것’이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내 신앙의 표현 방법이다.
처음엔 신앙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못했다. 어떤 것이든 무슨 말이든 믿고 따르는 것이 옳은 신앙이며 이를 의심하는 것은 내 믿음의 부족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의심은 짙어갔고, 내 믿음을 의심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성당을 떠나거나 할 일은 절대 없었기에 그냥 알기를 단념했고, 오히려 마음은 편해졌다. 그러던 중 ‘쉬는 청년 교우들’에 관한 보고서를 쓸 일이 있어 4명의 청년들과 3번을 함께, 1번을 따로 만나며 인터뷰를 진행한 경험이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그들이 교회와 교리에 관해 많은 것을 잘못 알고 있으며 그들이 겪은 일부의 경험이 성당 전체의 모습으로 비쳤고, 또 제대로 배울 기회조차 없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건 아닌데...’에 머물렀을 뿐, 구체적으로 얘기해 줄 지식도 없었고 표현도 서툴렀다. 그렇게 부끄러운 마음으로 몇 년 동안 멀리했던 성서를 다시 펼치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대학생 때 중고등부 교리교사를 하면서 접했던 교리와 성경 그리고 몇 년 전 독서 봉사 때 읽었던 성경 그리고 주일 미사 때 읽는 매일 미사가 전부인 채로 십 년이 넘은 시간을 보냈고, 그것이 잘 못된 일인지도 자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신앙에 관해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여러 여건 상 정해진 시간에 성경공부를 하러 나갈 수 없어 온라인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의심 나거나 이해가 안 가는 구절이 있으면 또 다른 신부님의 말씀 그리고 교회 목사님의 강의도 찾아들었다. 같은 구절이라도 해석하는 방법과 성찰이 다른 경우가 많았고 각자의 경험에서 녹아든 말씀이기에 모두가 소중했다. 그리고 교회 문헌에 관해 읽고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 영상이나 사이트를 찾아 공부했다. 그 안에서 신부님들께서 추천해주시는 교회 서적도 읽고 또 다른 종교에 관한 책들도 가급적이면 많이 읽고자 했다. 이 중 좋은 것은 많이 공유하되 자칫 강요와 부담이 될 수 있어 조심하기도 했다. 함께 만날 때에는 그동안의 신앙에 관해 다 같이 많은 나눔을 하고자 했다. 그리고 배우는 데서 그치지 않기 위해 성당에서 봉사활동 및 교회 관련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열심히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 많은 순간 보는 눈, 듣는 귀를 가지려 노력한다. 하루의 삶 속에 얼마나 많은 부분에 주님의 사랑과 경이로움이 존재하는지 허투루 보지 않고 감사를 드리고자 한다.
나의 변화는 배움이 많아질수록 신앙 안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짐을 느낀다. 내가 알고 있던 아주 작은 신앙으로 함부로 교리에 관해, 교회에 관해, 사람들에 관해 판단하고 분노했던 모든 일들이 '나 중심적 사고'에서 비롯됐음을 알게 되었다. 나를 버리고 주님께로 향하겠다는 나의 회개가 여전히 나를 향해 방향을 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내가 먼저 말하지 않고 사람들이 먼저 내게 말을 건네길 기도한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주님을 따라 살고자 해도 그 모습이 별로이면 누구도 선뜻 주님의 길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열심히 고통을 인내하는 모습 또한 별로일 터이고, 생각 없이 즐거운 모습은 더더욱 별로일 것이다. 고통을 인내하되 진심으로 행하는 모습이 편안하게 나타날 때, 사람들 또한 나를 통해 주님을 보고 그 길에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될 것이라 믿는다.
내 신앙은 그렇게 많이 배워야 함을 알고, 배우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이를 삶과 신앙 안에서 실천하며 이 모든 것이 나만의 생각과 판단에 머무르지 않고 보는 이들에게도 편안하게 보이는 순간이 올 때까지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사랑하며 행동으로 실천하는 신앙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