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5 현명과 정의의 덕

by 박 윤여재

<주제>

현명과 정의의 덕을 쌓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나요?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는 현명과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드리기 위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요?




<온 세상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 김옥순 수녀>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는 성숙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수능 1등급과 토익 만점을 위해 10대, 20대 시간의 대부분을 투자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학창 시절처럼, 신앙의 길에도 1등급과 만점이 있을까? 아마 분명히 있을 것이다. 다만, 문제만 주어질 뿐 그 답과 채점은 오롯이 주님의 몫이다. 우리가 감히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더 미치겠다. 답을 정확히 알아야 예습 복습도 철저히 하고, 밤도 새워가며 열심히 공부할 텐데.

하지만 이런 나를 보며 주님께서는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내가 언제 답을 안 가르쳐 주었느냐? 매일 매번 답을 가르쳐주었는데 매번 딴 소리를 하는구나.’ 하고 허허 웃으실 것 같다. 그럼 나는 또 이렇게 답을 할 것이다. ‘주님, 수능과 토익은 객관식인데, 주님께서 주신 문제는 모두 논술형입니다. 수능에서도 논술 합격은 신의 한 수라고 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노력인 '현명'과 '정의'에 대해 비교적 명확한 정의가 있다. '현명'은 참된 선을 식별하여 이를 실천하는 옳은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며, '정의'는 하느님께 드릴 것을 드리고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는 지속적이고 확고한 의지라 했다. 아... 더 어렵다. '참된 선'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를 실천하는 '올바른 방법'은 어떻게 선택할까? '하느님께 드릴 것'과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은 또 무엇일까? 정확히 알아야 드릴 텐데... 어렵고 어렵다.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하기 위해 우선 이 의미를 '잘 아는 것'이 가장 필요하고 절실했다. 하지만 언어란 우리 인간의 수단일 뿐 하느님의 그 크신 뜻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아니라 했다. '하느님의 참된 선'은 우리가 말로 글자로 표현할 수 있는 그것을 훨씬 넘어서는 무엇일 것이다. 성경을 찾아 읽어도, 책을 읽어도 '참된 선' 은 모호하다. '하느님께 드릴 것'은 더욱 그 기준이 모호하다. 분명 물질적 대상이 다는 아닐 것이기에.


온 세상에 아니 우리나라 만해도 그리스도교인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세상은 여전히 혼탁하고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이는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 채, 모르고 잘못 행하고 있거나 아님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정말 '잘 아는 것'이 실천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인지 더욱 깨닫게 된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 함께 하는 세상은 일반 세상과는 달라야 할 텐데 성당이라는 공동체조차 일반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세속주의에 물들어가는 교회의 모습을 탓하거나 성직자들의 권위주의를 비난하지 신앙을 바라보는 자신의 생각이나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는 거의 생각지 못한다고 했다. 교회 공동체에 대한 불만이 많아질수록 나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는 것이 가장 필요한 일임을 알게 되었다. 나라는 '작고 견고한 틀'로 바라본 시각은 극히 일부일 뿐인데 마치 전부인 양 확신을 갖고 바라보는 나 자신을 매번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지금의 나에게 현명의 '참된 선'을 식별하여 실천하는 방법은,

기도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세상적 욕심에 하느님을 이용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의 기준에 흔들림 없이 하느님의 뜻을 더 믿고 따르는 길을 잘 선택하는 것이다. 정작 잘못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지으면서 하느님께 용서받았다고 기뻐하지 않는지, 다른 사람들 덕분에 잘 살고 있으면서 감사는 하느님께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매 순간 생각하는 것이다. 현명함을 위해 지적인 공부보다 반성적 성찰이 내겐 더 필요한 일인 것 같다. 머리로만 이해한 채 머무르는 것은 더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정의 안에서 '하느님 것은 하느님께 드리고 이웃의 것은 이웃에게 드리기 위한 기준'을 생각하니,

레미제라블의 미리엘 주교가 생각난다. 장발장이 은그릇을 훔쳐 달아난 후 마글루아르 부인이 장발장의 짓이 틀림없다고 하자 주교는 “부인, 내 잘못으로 오랫동안 은그릇을 우리가 갖고 있었소.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오. 그 사나이는 가난한 사람임에 틀림없소.” 하고 말했다. 나는 '봉사와 기부'라는 단어를 대할 때마다 이 구절이 생각난다. 내 시간을 내어 봉사하고, 내 것을 내어 기부한다는 생각이 아닌 애초에 내 것이 아니기에 돌려준다는 의무에 가까운 절실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레고리오 성인 또한 ‘가난한 이들에게 필수적인 물건들을 줄 때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것을 선물로 베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을 돌려주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 8) 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 마음을 명심하고 봉사를 하는 것이 곧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작은 노력임을 깨닫게 된다.

결국 지금의 내가 '현명'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은 구체적인 방법을 실천하기에 앞서 매 순간 그 단어의 의미를 성찰하고 기억하는 것이 우선이다. 아직도 내겐 이것이 어렵기만 하다. 무엇이 선인지 제대로 안다면 누구나 선을 선택하고 행하게 된다는 지행합일설처럼 나도 '현명'과 '정의'를 제대로 안다면, 일상의 삶 안에서 자유롭게 그것을 선택하고 행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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